'빅 보이' 이대호(30)가 화제다. 지난해까지는 한국에서 최고였던 이대호는 올해 소속팀 오릭스 버팔로스의 중심타자뿐 아니라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타자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이대호의 성적표를 'A+'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일본 진출 첫해 작성됐기 때문이다. '국보' , '천재' , '홈런왕' 도 일본 진출 첫해에는 쓴맛을 봤다. 야구가 '국기(國技)'라는 일본은 그만큼 수준이 높다.

이대호가 속해 있는 오릭스는 퍼시픽리그 6개 팀 중 꼴찌다. 전력이 가장 약하다는 거다. 그런데도 이대호는 타점 1위를 사실상 예약해놓은 가운데 홈런왕과 3할 타율에도 도전하고 있다.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지만 이런 페이스가 유지된다면 이대호는 3할-30홈런-100타점까지도 기대할 만하다.

(삼성)이 요미우리 소속이던 2006년 타율 3할2푼3리에 41홈런 108타점의 찬란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지만 타이틀 1위에는 한 뼘 모자랐다. 이대호가 홈런, 타점 2관왕에 오른다면 한국 타자로는 최초가 된다.

이대호는 그러나 "시즌 중 기록은 의식하지 않는다. 끝까지 좋은 타격을 하다 보면 (기록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며 담담한 자세로 임하고 있다.

두 차례 위기 딛고 최고 자리에

천하의 이대호라고 처음부터 잘나갔던 것은 아니다. 두 차례 결정적 위기를 잘 극복했기에 오늘날 이대호가 있는 것이다.

2001년 경남고를 졸업하고 롯데에 입단했을 때 이대호의 포지션은 투수였다. 하지만 150㎏(192㎝)에 가까운 체중 때문에 투수로는 도저히 성공하기 어려웠다.

이대호는 입단 후 얼마 안돼 공 대신 방망이를 잡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2002년에는 '무조건 살을 빼라'는 백인천 감독의 엄명에 따라 쪼그려 뛰기 등 무리하게 운동하다 무릎과 발목을 크게 다쳐 수술까지 받았다.

타자로 변신한 뒤로도 영 신통치 않았던 이대호는 그해 결국 트레이드 카드로 나왔다. 선수 보는 데 안목이 남달랐던 현대 김용휘 사장과 정재호 단장은 이대호만 받을 수 있다면 어지간한 선수는 다 내줄 수 있다고 화답했다.

이승엽
롯데로서도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성사 직전에 이르렀던 트레이드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롯데 고위층에서 "그래도 이대호는 경남고 출신의 롯데 프랜차이즈 선수"라며 트레이드 불가를 선언했다.

결과론이지만 만일 이대호가 뛰어난 선수들이 즐비했던 현대로 이적했다면 지금의 이대호가 될 수 있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대호가 입단했던 2001년부터 5, 6년간 롯데는 암흑기라 불렸을 만큼 성적이 바닥을 면치 못했다. 이대호에게는 부진할 때도 자리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돼 있었던 셈이다.

2004년 20홈런으로 거포로서 가능성을 확인한 이대호가 성공가도에 들어선 연 것은 2006년이다. 그해 이대호는 타격 홈런 타점 3관왕에 오르며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세상에 알렸다. 타격 3관왕은 1984년 삼성 이만수 이후 22년 만이었다.

이후 국내 야구를 쥐락펴락하는 거물로 성장한 이대호는 2010년 사상 첫 타격 7관왕에 오르는 대기록을 남겼다. 도루를 제외한 타격 홈런 타점 등 공격 전분야에서 이대호가 1등을 한 것이다. 타격 7관왕은 이대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가능성이 크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이대호는 오릭스 구단과 2년간 계약금 2억엔, 연봉 2억5,000만엔, 인센티브 3,000만엔 등 총 7억6,000만엔(약 110억5,000만원)에 계약했다. 이는 일본에 진출했던 한국 선수로는 2004년 (2년 5억엔), 2009년 김태균(3년 7억엔)을 뛰어넘는 규모다. 또 한국프로야구를 경험한 선수 중 일본 진출은 13번째, 타자로는 이병규 김태균 이범호에 이어 6번째다.

임창용
야구 잘하는 '82' 유전자

한국야구에서 '82'라는 숫자는 의미가 남다르다. 야구를 잘할 수밖에 없는 사주(四柱)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한국프로야구는 1982년 3월27일에 출범했고, 그해 대학교에 입학한 82학번들 중에는 유난히 스타가 많다. 박노준 김건우 장채근 김상국 한희민 김태원 이효봉 등이 82학번을 대표하는 선수들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에 태어난 선수들도 야구를 참 잘한다. 김태균(한화) 추신수(클리블랜드) 정근우(SK) 이대호 등은 고3이던 2000년 캐나다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들로 프로에 들어온 뒤로도 한국야구의 기둥으로 성장했다.

82년생들 중에서도 굳이 '빅 3'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김태균 추신수 이대호일 것이다. 김태균은 프로 첫해였던 2001년 신인왕을 차지하며 고등학교 때의 명성을 곧바로 프로로 이어갔고, 추신수는 미국프로야구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3할 타율-20홈런-20도루의 위업을 남기는 등 맹활약이다.

이종범
그에 비하면 이대호는 상대적으로 왜소했다. 이대호는 2006년에는 타격 3관왕(0.336 26홈런 88타점)을 차지하고도 기록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고졸신인 투수 류현진(한화)에게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를 내줘야 했다.

꼬박 9시즌을 뛰어야 얻을 수 있는 FA 자격도 이대호는 동기생인 김태균보다 2년 늦게 취득했다. 2009년 말 김태균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일본프로야구 지바 롯데 유니폼을 입을 때, 이대호는 조용히 지켜봐야만 했다.

'절친' 김태균이 일본으로 간 뒤에도 2년 동안 국내무대를 지켰던 이대호는 지난해 말 최고 조건으로 일본프로야구에 입성했다. 동기생인 추신수와 김태균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롱런 가도가 보인다

오릭스 구단과 계약기간은 내년까지다. 관건은 이후다. 이대호가 오릭스와 계약을 연장할지, 아니면 요미우리나 주니치 같은 전통의 명문구단으로 이적할지 아직은 모른다.

선동열
다만 내년에도 좋은 성적을 낸다면 일본에서 롱런은 보장받게 된다. 은 일본 진출 첫해였던 2004년에 부진했지만 2005년 30홈런으로 우뚝 서며 요미우리로 이적했고, 이후 작년까지 총 8년간 일본에서 활약했다. 이 이대호에게는 '모델'이 될 수 있다.

일본야구는 여러 면에서 한국보다 한 수 위다. 특히 징그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드는 '현미경 야구'에 내노라는 스타들이 두 손을 들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대호의 롱런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시각이 많다. 기술적으로 이대호는 거포이면서도 정교한 타자다. 국내 11시즌 동안 통산 3할9리를 쳤던 이대호는 일본 진출 첫해에도 시즌 막판까지 3할 가까운 타율을 유지하고 있다.

홈런이 좀 안 나오더라도 안타로 팀에 공헌할 수 있고, 자신의 페이스도 유지할 수 있는 선수가 이대호다. 실제로 이대호는 20호 홈런 이후 15경기 동안 홈런은 치지 못했지만 안타는 꾸준히 생산했다.

체중이 150㎏에 육박하는 거구임에도 '체조선수'만큼 유연하다는 것은 이대호에게 크나큰 축복이다. 유연하다는 것은 부상 위험이 작고, 또 부상을 당해도 회복 속도가 빠르다는 이점이 있다. 전문 트레이너들은 종목을 불문하고 롱런의 첫째 조건으로 유연성을 든다.

벨트 버클이 배꼽 한참 아래에 있는 이대호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수비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이 안 든다. 차라리 백두급 씨름선수나 무제한급 유도선수가 더 어울릴 법하다.

그렇지만 이대호는 '물찬제비'를 연상케 할만한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벼락 같은 타구를 곧잘 잡아낸다. 일본에서는 공격력 극대화를 위해 1루수로 나서고 있지만 국내에서 뛸 때만 해도 이대호는 3루수였다.

2008년부터 3년간 팀을 지휘했던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은 "덩치가 크다고 해서 수비를 못할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라며 "이대호는 어느 선수보다 유연하기에 3루수로서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연령적으로도 이대호의 롱런 가능성은 크다. 이대호는 국내프로야구를 11년이나 경험한 데다 이제 만 30세인 만큼 본인의 노력과 치밀한 관리가 뒷받침된다면 앞으로 4, 5년은 전성기를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기술적으로 정교함, 신체적으로 유연함, 연령적으로 전성기 등 여러 여건을 고려해볼 때 이대호의 시대는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빅 보이' 이대호의 성공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다.

●이대호 프로필

출생: 1982년 6월 21일

신체조건: 192㎝ 130㎏(공식 체중)

신발 사이즈: 305㎜

유형: 우투우타

가족관계: 부인 신혜정씨와 1녀

출신교: 수영초-대동중-경남고

소속팀: 오릭스 버팔로스

포지션: 1루수

주요기록: 2006년 타격 3관왕

2010년 타격 7관왕

2010년 9경기 연속 홈런

1,150경기 3할9리 1,250안타

225홈런 809타점 9도루(국내 11년 통산)

주요수상: 2005년 올스타전 MVP

2006년 골든글러브 수상

2007년 골든글러브 수상

2008년 올스타전 MVP

2010년 정규시즌 MVP

2011년 골든글러브 수상

일본 진출 첫해, 한국 선수들 거의 죽 쒔다
도 자책점 5.5
부상으로 공백
김태균·은 성공적

한국에서는 최고였던 선수들이었지만 일본 진출 첫해에는 대체로 자존심을 구겼다. 낯선 환경, 더 잘해야 한다는 심리적 중압감, 일본 야구의 높은 수준 등이 발목을 잡았다.

한국프로야구를 거쳐 일본에 진출한 선수는 올해 이대호를 포함해 모두 13명. 이 가운데 첫해 '성공'을 거둔 선수는 이대호(오릭스) 김태균(한화) 구대성 (야쿠르트) 정도다.

한때 "학점이 방어율"이라는 유행어를 낳았던 은 일본 진출 첫해였던 1996년 5승1패3세이브 평균자책점 5.50에 그쳤다. 은 스프링캠프가 한창이던 2월 모친상을 당하는 바람에 훈련이 부족했던 게 부진 원인이었다.

'야구천재' 도 1998년 타율 2할8푼3리에 10홈런 29타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한참 잘나가던 터에 한신 가와지리의 투구에 오른 팔꿈치를 맞고 시즌을 접은 게 아쉬웠다. 훗날 은 "그때 그 사건 이후 몸쪽 공에 대한 두려움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아시아 홈런왕' (삼성)은 2004년 지바 롯데에서 타율 2할4푼에 14홈런 50타점으로 고개를 숙였고, '적토마' 이병규(LG)는 2007년 타율 2할6푼2리에 9홈런 46타점이 고작이었다.

2009년 홈런왕 김태균은 2010년 타율 2할6푼8리에 21홈런 92타점으로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냈으나, 이범호(KIA)는 같은 해 1군에 48경기밖에 나가지 못한 끝에 2할2푼6리 4홈런 8타점에 머물렀다.

투수들 중 첫해 'A학점'을 받은 선수로는 구대성과 정도뿐이다. 이상훈은 1998년 1승에 평균자책점 4.68, 정민철은 2000년 2승, 정민태는 2001년 2승, 이혜천은 2009년 1승1패1세이브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특히 정민철과 정민태는 '한국 선수들의 무덤'이라는 요미우리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반면 '전천후 요격기' 구대성은 2001년 7승9패 평균자책점 4.06, '수호신' 은 2008년 1승5패33세이브 평균자책점 3.00을 기록하며 일약 팀의 기둥으로 발돋움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