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군(軍)이 '진실' 앞에 침묵하고 있다. 심지어 신의 성실에 기반한 협의를 깨고 사실을 왜곡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행태마저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군 의문사 사례인 고 김훈 중위 사건을 대하는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최근 처신이 그러하다.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는 지난 8월 6일 김훈 중위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 결정에 따른 순직처리 권고안'을 육군본부에 보냈다. 관계 법령(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 제50조)에 따르면 육군본부는 30일 이내에 권익위에 그 사유를 서면으로 답변하거나 이의신청을 하게 돼 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30일이 훨씬 지나도록 아무런 답변도, 이의신청도 하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최근 밝혀졌다. 육군본부(인사처)가 권익위의 '순직처리 권고안'에 대해 자체 심사하지 않고, 보름여가 지난 20일 국방부(조사본부)에 김훈 중위 사망과 '업무 관련성'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의뢰한 것이다.

개정된 '전공사상자 처리 훈령'(7월 1일 시행)의 규정(제6조 3항)에 따르면 육군본부는 '조사권한을 가진 타 국가기관이 군의 결정과 다른 권고 또는 결정을 한 때에는 재심사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김훈 중위는 1998년 2월 24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초소에서 의문의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국방부는 충분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사망 직후부터 '자살'로 결론짓고 지금까지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김 중위의 유족과 일부 전문가들은 과학적 증거와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타살' 주장을 해왔다.

故 김훈 중위
이에 국회 국방위원회에 설치되었던 '김훈 중위 사건 진상규명소위원회', 대법원 판결, 대통령 소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은 김 중위의 사인을 '타살', 또는 '진위불능'으로 결론내렸다. 권익위 또한 3월22일 실시한 총기실험결과 등을 토대로 김 중위의 사인을 '자살'로 보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이렇듯 김 중위의 사인에 대해 4개 국가기관은 군과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개정된 '전공사상자 처리 훈령' 에 따르면 육군본부는 4개 국가기관의 결정 또는 권고를 받아들여 순직처리에 대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육군본부가 김 중위의 사망에 대한 권익위의 '순직처리 권고안'을 자체 심사하지 않고 국방부에 조사를 의뢰한 것은 그 '저의'를 의심케 한다. 개정 훈령(제6조 3항)에 따라 육군본부가 국방부측에 조사를 의뢰할 수는 있지만, 그걸 이유로 권익위의 '순직처리 권고안'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특히 개정 훈령은 국방부가 그동안 다른 국가기관의 결정을 무시해온 전례를 합리적으로 조정했다는 취지를 담고 있지 않는가? 권익위는 지난 5월부터 국방부 및 육ㆍ해ㆍ공군 관계자들과 전공사상자 순직 처리에 관해 논의를 한 끝에 6월 말 합리적인 개정 훈령을 만들어 7월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훈령 개정 이후 육군본부는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순직처리 권고안을 낸 9건에 대해 모두 자체 심사를 한 반면, 권익위의 김훈 중위 순직처리 권고안에 대해서만 국방부에 재조사를 의뢰한 것은 의혹을 가중시킨다.

국방부가 김 중위의 사망과 업무 관련성 여부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육군본부에 통보하는 것은 전적으로 국방부에 달렸다. 국방부는 여전히 김 중위 사인을 '자살'로 보고 있고, 자칫 조사기간이 길어질 경우 이명박 정부 임기와 맞물려 군 수뇌부들이 바뀔 수 있다. 가령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김관진 국방부 장관 등이 교체될 경우 김 중위 사건은 '진실 규명'에서 더 멀어질 수 있다.

군 의문사 문제 해결의 시금석이 될 김훈 중위 사건의 처리가 국방부의 고집에 의해 유야무야된다면,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받은 다른 48건의 해결도 난망하다.

실제로 국방부 안팎에선 그런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권익위 관계자에 따르면 김훈 중위는 새로 개정된 전공사상자 처리훈령에 따라 "공무수행 중 또는 공무와 관련된 사고 및 재해로 발생한 사망 또는 상이자"로 처리하기로 국방부와 잠정 합의를 했지만, 최근 국방부의 태도가 변했다고 한다. 국방부 조사본부 측이 '김훈 중위의 경우 순직처리를 해주기는 하겠지만, 사인은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로 하겠다'고 알려왔다는 것. 또한 전문가들에게 사망 당시 김훈 중위의 정신 상태에 대한 자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결과가 나오려면 앞으로 몇 달 더 걸리겠다는 비공식 통보도 있었다고 한다.

국방부 조사본부 측의 이러한 태도에 김 중위 유족 측은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김 중위의 부친 김척 예비역 육군중장은 "조사본부의 그러한 방침은 국회와 대법원, 군의문사위원회, 권익위 등 4개 국가기관의 판단을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위법행위"라고 주장했다.

권익위 관계자는 "조사본부가 김훈 중위의 순직 처리 권고에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 가능성을 들고 나온 것은 신의 성실을 바탕으로 한 국가기관 사이의 협의를 원천무효로 돌리는 행위"라며 "대통령, 국회, 감사원 등에 자세한 경위를 보고하고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모두 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육군본부 관계자는 "접수된 순서대로 조사를 하고 있을 뿐 고의적으로 김훈 중위 순직 처리를 늦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국방부 조사본부 관계자는 "육군본부에서 조사를 의뢰해왔기 때문에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며 "김훈 중위의 경우 정신질환으로 인한 자살에 해당된다는 것은 실무자 개인의 의견일 뿐 조사본부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훈 중위 순직 처리에 대해 육군본부 인사 수뇌부와 국방부 측이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온 터라 김훈 중위를 비롯한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받은 이들의 명예 회복은 상당 기간 미뤄지거나 굴절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