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이찬형(1888~1966년)은 똑똑했다. 할아버지에게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우더니 1901년 평안감사가 주최한 백일장에서 장원급제했다. 관선유학 시험에 합격한 이찬형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고 1914년 조선인 최초로 판사가 됐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다. 3ㆍ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함흥지방법원에서 독립투사를 심판해야만 했다. 2남 1녀를 둔 가장 이찬형은 1923년 흉악범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나서 "내가 무슨 권리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나"라며 자책했다.

식음을 전폐하던 이찬형은 집을 떠나 엿장수가 됐다. 전국을 떠돌던 엿장수는 1925년 불교에 귀의했다. 효봉(曉峰) 스님은 엉덩이에 살이 헐고 진물이 나 방석과 들러붙을 때까지 정진했다. 이때부터 엿장수 중은 절구통 수좌로 불렸다. "깨닫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더 효봉 스님은 1931년 금강산 법기암 뒷산 굴에 들어가가더니 1년 6개월 만에 도(道)를 깨쳤다. 효봉 스님은 1937년 자신이 머물던 유점사를 방문한 큰아들 부부를 보고 나서 금강산을 떠났다.

효봉 스님은 순천 송광사에 정착해 제자를 길렀다. 참선(參禪)을 강조했던 효봉 스님은 스스로 정한 네 가지 규칙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 묵언(默言)을 엄격하게 지켰다. 조계종 종정(1958년)을 거쳐 통합종단 초대 종정(1962년)이 된 효봉 스님은 생일을 묻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생불생(生不生) 사불사(死不死)라, 살아도 산 것이 아니오,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거늘, 이 늙은 중에게 무슨 생일이 따로 있겠소이까"라고 대답했다.

효봉 스님은 1966년 10월 15일 새벽 3시에 "나 오늘 갈란다"라고 말했다. 동이 트고 나서도 돌아가던 염주는 오전 10시에 멈추었고, 효봉 스님은 꼿꼿하게 앉은 채 입적했다. 우여곡절 끝에 큰스님이 된 효봉(曉峰) 스님은 선과 지혜를 강조한 정혜쌍수(定慧雙修) 구도관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