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1948년 건국하자 이집트를 중심으로 아랍은 반발했다.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유럽 각지를 떠돌던 유대인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랍인은 2,000년 동안 살던 터전을 뺏기고 경악했다. 이집트를 중심으로 아랍은 반발했고, 이스라엘과 제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아랍은 이집트 병력을 앞세워 전쟁 초반 우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패배를 선언했다.

1956년 10월 29일 오후 3시 30분. 이스라엘 수송기 16대가 공수부대를 싣고 날아올랐고, 이스라엘 전차는 이집트 시나이 반도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제2차 중동전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이스라엘을 돕고자 군대를 이집트로 보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미 전세를 장악해 영국과 프랑스 군은 할 일이 없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제2차 중동전쟁은 수에즈 위기라고도 불린다.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이권 다툼이 전쟁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수에즈 운하는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하지 않고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유일한 항로다. 이집트가 1956년 7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면서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을 막자 운하 운영권을 뺏긴 영국과 프랑스가 발끈했다. 원유를 안전하게 수송할 항로를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이스라엘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승승장구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비난에 몸을 사렸다. 사사건건 이스라엘 편을 들던 미국마저 등을 돌렸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총리 관저에 전화를 걸어 비난을 퍼부었다. 영국은 금융 위기를 맞았는데 미국이 국제통화기금(IMF) 돈줄을 막자 수에즈 운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소련이 한목소리로 비난하자 프랑스도 빈손으로 이집트를 떠났다.

수에즈 위기는 국제 정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국제연합(UN)은 11월 14일 이스라엘 연합군 철수와 유엔군 파견을 결의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이때 생겼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잃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프랑스는 미국이 주도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했다. 중동이 화약고처럼 위태롭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미국은 수에즈 위기를 겪고 나서 석유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