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정상회담 6억 달러 요구설' 진실은… 김대중·노무현 시절 약속'북한판 마셜플랜'지속적으로 요구한 듯

지난 2009년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당시 현인택(오른쪽) 통일부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만나 면담했다. 자료사진
느닷없는 '남북정상회담 돈거래설'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2009년 남북비밀접촉시 북한이 막판에 6억달러를 요구해 정상회담이 무산됐다는 한 언론 보도가 진위 논란을 불러온 것.

지난달 26일자 <중앙일보>는 외교안보 분야 전직 고위 당국자를 인용해 "2009년 11월 비밀접촉 장소에 나온 김양건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대뜸 '회담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필요하다'며 대가조로 5억∼6억 달러를 요구했다"며, 김양건 부장이 이같은 내용의 비밀양해 각서에 사인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평양에 가겠다는 입장이었지만 막판에 불거진 6억 달러로 인해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남북정상회담 진행 과정을 비롯해 남북 접촉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은 "사실과 다르고 심지어 왜곡까지 됐다"고 주장했다.

한 북한 소식통은 "당시 남북 간에 정상회담이 추진된 것은 맞지만 김양건 부장이 5억∼6억 달러를 요구해 무산됐다는 것은 틀린 얘기"라고 전했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이 대통령의 주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오히려 한국 정부 측에서 먼저 돈 얘기를 꺼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남북 접촉에서 북한은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막대한 대북지원, 이른바 '북한판 마셜플랜'을 이행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 지지 않자 정상회담을 거부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언론 보도와 북한 소식통의 전언 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2009년 당시 남북 비밀접촉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은 10월 17~19일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부장을 수차례 만나 정상회담을 조율했다. 임 장관 외에 현인택(현 대통령 통일특보) 통일부 장관과 김천식(현 통일부 차관) 통일부 통일정책실장도 김양건 부장을 여러 차례 접촉해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협의를 했다. 이 대통령이 핵 문제 해결을 위해 평양행까지 고집했지만 김양건 부장의 대가 요구로 정상회담은 불발됐다.

그러나 당사자인 임태희 전 대통령 실장은 실제와는 다른 듯한 입장을 보였다. 임 전 실장은 지난달 26일 <헤럴드경제>와의 전화 통화에서 "적어도 내가 북측과 접촉하는 동안 돈 얘기는 없었다"며 "김양건을 만난 이후 통일부와 통전부라인(통통라인)에서 마무리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해 손을 뗐는데, 혹 통일부와 통전부 실무접촉에서 있었던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임 전 실장은 "북측은 당시 식량사정이 어렵다며 노무현 정부 때 수준의 식량지원을 거론했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인도적 지원을 위해서라도 이산가족 문제와 국군포로, 납북자 송환 등 '프라이카우프' 방식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요구했고 북측도 이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임 전 실장은 2009년 11월 3차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비밀접촉 도중 김양건 부장이 5억∼6억 달러를 요구하는 바람에 회담이 무산됐다는 언론 보도와 관련 "김양건과의 접촉에서 의제와 시기, 장소 등은 거의 다 정리됐었지만 돈 얘기는 없었다"고 거듭 확인했다.

그의 말 대로라면 김양건 부장의 5억∼6억 달러 요구와 정상회담 무산은 당시 실무협의를 한 통일부 측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인택 특보와 통일부는 그와 관련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현 특보의 측근은 "현 특보는 장관 재임 시절 (남북 비밀접촉을 위해) 해외에 나간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통일부의 한 당국자는 "(2009년 정상회담이 무산된 이유는) 북한이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주목되는 것은 지난해 6월 북한이 "남북 비밀접촉 과정에 남측이 돈봉투를 건네려 했다"고 폭로한 사건이다. 북한 국방위원회 대변인은 지난해 6월1일 "5월9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남측의 김태효 대통령 대외전략비서관, 김천식 통일부 통일정책실장, 홍창화 국가정보원 국장이 회담에 나섰다"고 공개하고, 남측이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을 갖자고 제안하면서 돈봉투를 내놨다고 폭로했다. 정부는 "북한의 일방적 주장"이라며 일축했지만 내용이 구체적이어서 파문은 적지 않았다.

남북관계에 정통한 국내외 소식통에 따르면 2009년 11월 남북 비밀접촉이 무산된 이후에도 이명박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물밑 접촉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8월 중앙아시아 3국 순방, 올해 1월초 중국 국빈 방문, 5월 12~14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담에 나서는 과정에 측근들은 북측과 접촉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9월 7~9일 이 대통령이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참가 차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를 때도 측근들은 북측 관계자들과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남북 접촉에서, 특히 정상회담을 전제한 만남에서 북한이 일관되게 요구하는 것은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약속한 '북한판 마셜플랜' 이행이라고 한다. 그 내용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규모 북한지원 플랜이라는 게 소식통의 전언이다.

앞서 통일부 당국자가 2009년 정상회담이 무산된 이유가 북한이 무리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대북 소식통은 그 '무리한 요구'를 '북한판 마셜플랜'으로 해석한다.

김양건 부장은 2009년 8월21일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위한 북측 사절단으로 서울에 왔을 때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와의 면담에서, 그리고 23일 이명박 대통령과의 접견에서 '북한판 마셜플랜'에 대한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태희 전 실장과 통일부 측의 언급, 그리고 북한 소식통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2009년 3차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비밀접촉이 김양건 부장의 5억∼6억 달러 요구 때문에 무산됐다는 주장에는 의문이 따른다.

또한 대선을 한달여 앞둔 묘한 시기에 뜬금없이 '남북정상회담 돈거래설'이 나온 배경도 의아스럽다. 이것이 대선 풍향계로 작용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