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친구 '콜카타의 성녀'

"하느님의 연필이 바로 나다. 하느님은 작은 몽당연필로 좋아하는 것을 그리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그것으로 너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신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마더 테레사(1910~1997년) 수녀는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며 자신을 한껏 낮췄다. 심지어 죽음을 앞두고도 비싼 치료를 거부하며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받던 치료만큼만 원했다.

테레사 수녀는 1910년 마케도니아 수도 스코페에서 태어났다. 스코페는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속한 도시였다. 아르메니아계 아버지와 알바니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테레사 수녀의 본명은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였다. 스코페에선 보기 드문 가톨릭교도였던 보야지우는 18세에 아일랜드로 건너가 로레타 수녀회에 들어갔다.

테레사 수녀는 1931년부터 인도 콜카타에 있던 성 마리아 수녀원에서 지리학을 가르쳤다. 테레사 수녀는 '거리에서 고통을 받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1946년 기차 안에서 들었다고 밝혔다. 테레사 수녀는 우여곡절 끝에 1948년부터 콜카타 빈민가에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힌두교의 나라는 테레사 수녀의 행동을 선교로 생각해 적대시했다.

테레사 수녀는 평생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 살았다. 검은 수녀복을 벗고 인도식 흰색 사리를 입었고, 빈민가에서 아픈 사람을 돌보며 아동을 가르쳤다. 그는 미혼모와 고아를 위한 집을 세웠고, 나병 환자가 재활할 수 있도록 돕는 마을도 조성했다. 종교는 달라도 헌신과 사랑은 통했다. 결국 인도인은 테레사 수녀를 어머니(mother)라고 불렀다.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서 가톨릭 수녀는 살아있는 성녀(聖女)로 불렸다.

1979년 12월 10일 테레사 수녀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상금을 받은 테레사 수녀는 "이 돈으로 빵을 몇 개나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상금은 콜카타 빈민을 위해 사용됐고, 테레사 수녀는 시상식 만찬 비용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하자고 부탁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