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나물그저 말린 나물 아닌 발효 식품 시래기가 대표적고기요리 소화 돕는 광명 맛찬들의 시래기밥대치동 '시래옥' 생선조림은 묵나물이 주인공

광명 ‘맛찬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묵나물’은 ‘묵은 나물’이다. 나물이 아주 좋은 계절에 산이나 들에서 뜯어다 잘 말려서 이듬해 봄에 먹는 나물을 통칭하는 말이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묵을 잘 말려서 보관하다가 사용할 즈음 물에 불린 다음 무친 것도 묵나물이라고 한다. 여기서 ‘묵’은 도토리묵이나 메밀묵 등을 이른다.

사전에는 “정월 대보름에 여러 종류의 나물 말린 것을 마련하여 먹는데 이것을 ‘묵나물’ 혹은 ‘묵나물 밥’이라고 한다”고 적혀 있다. 말린 나물을 겨울철 혹은 이듬해 봄철에 꺼내 먹는 것을 묵나물이라고 하지만 특히 정월 대보름에 먹는 묵은 나물을 묵나물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한식의 특질을 이야기할 때 흔히 “제철에 나는 식재료를 사용한다”고 표현한다. 아주 그럴 듯한 말이지만 명백하게 틀린 말이다. 한식의 특질은 제철에 나는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밥상에서 흔하게 만나는 된장, 간장, 고추장과 김치 등이 제철에 나는 식재료를 사용한 것인가? 아니다. 모두 삭히고 묵힌 식품들이다. 된장, 간장, 고추장 등 이른바 장류(醬類)들은 콩, 소금, 물, 고춧가루 등을 바탕으로 ‘세월’의 무게를 얹은 것들이다. 김치는 배추나 무 등 채소와 소금, 젓갈, 생선 등을 기본으로 여기에 마찬가지로 ‘세월’의 무게를 얹은 발효식품들이다. 한식의 특질은 삭히고 묵힌 음식이지 신선한 날 음식이 아니다. 신선한 김치는 잘 삭히고 잘 보관한 것이지 그날 아침 밭에서 뽑아온 ‘신선한 배추’로 만든 것이 아니다. 한식은 같은 식재료라도 ‘세월’의 무게를 얹어 맛과 영양분을 더한 것이다. 신선한 제철 재료로 만든 음식은 차라리 날씨가 무더운 동남아의 음식들이 바로 그러하다.

오늘날 우리 밥상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이 ‘삭힘’ 즉, 발효와 세월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삭힌 음식이 아니라 무늬만 삭힌 음식인 가짜 발효음식, 가짜 조미료, 인공화학조미료 범벅인 음식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

서울 인사동 ‘초정’
과메기를 그저 청어나 꽁치 말린 것쯤으로 생각하니 열풍 건조한 과메기가 판을 친다. 과메기가 꽁치 말린 것이라면 콩을 잘 삶아서 열풍 건조한 것을 된장이라고 불러야 한다. 세월과 기다림의 음식을 모르니 ‘말린 것’과 ‘띄운 것’을 모른다. 과메기도 된장과 마찬가지로 발효식품이다.

중국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 편에 ‘선장양(善醬釀)’이란 표현이 나온다. 고구려 사람들이 곡물 발효 즉, 장(醬)을 잘 만들고 술을 잘 빚는다는 뜻이다. 이미 2천 년 전에 중국인들이 우리 선조들을 보고 내린 평이다. 역시 중국 측 기록에는 ‘발해의 메주가 좋다’는 표현도 있다.

묵나물은 ‘말린 나물’이 아니다. 묵나물은 말리면서 그 과정에 띄운 것, 발효시킨 나물이다. 묵나물 중 압권은 무청시래기다. 가을걷이 때 숱하게 나오는 무청을 처마 끝에 매달아 놓는 것은 단순히 말린 것이 아니라 말리면서 띄운 것이다. 무청시래기도 대표적인 ‘건조+발효’ 식품이다. 굳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발효식품이라야 해야 옳다. 김장김치가 배추나 무를 이용한 ‘습식 발효식품’이라면 시래기는 무청을 이용한 ‘건식 발효식품’이다.

한때 무청이 다이어트에 좋은 식재료라고 각광을 받았지만 우리 선조들은 오래 전부터 무청시래기를 이용했다. 무청시래기는 1960, 70년대까지도 가난한 태백산맥 언저리 강원도 산간, 경북 북부지방 농촌과 내륙 충청도의 주요한 겨울 반찬거리였다. 시래기 국도 끓이고 시래기 무침도 만들어 긴긴 겨울을 견뎠다. 조상들이 정월 대보름 ‘묵나물’ 축제를 한 것은 겨울철 우리 몸에 부족하기 쉬운 미네랄과 비타민 종류를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그동안 너무 흔해서 천대받았던 시래기가 슬슬 귀하신 몸이 되고 있다.

양평 ‘통나무집’
서울 대치동의 ‘시래옥’은 이름부터 시래기를 귀한 몸으로 만들었다. 대략 ‘시래기를 파는 집’ 쯤으로 해석되는데, 이집은 시래기에 쇠고기를 비롯한 생선 등을 넣고 졸이거나 무친다.

고기집 중에도 무청시래기를 잘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광명의 ‘맛찬들왕소금구이’는 숙성 돼지고기의 맛이 뛰어난 집이다. 이집은 고기를 먹은 후 식사를 주문하면 된장찌개와 더불어 시래기 밥을 내놓는다. 고기는 소화가 힘들고 몸에서 배출되는 시간도 길다. 이때 고기와 더불어 ‘발효식품’인 무청시래기를 섭취하면 소화도 쉽고 배출 시간도 줄여준다. 참 지혜로운 방법이다.

마포의 ‘화우명가’는 시래기만의 메뉴는 없지만 반찬 중에 한둘은 반드시 시래기로 만든 것이다. 시래기는 예전에는 참 흔하고 볼품없는 식재료였지만 이제는 귀한 식품이 되었다. 한우 등심 및 불고기 등을 내놓는 ‘화우명가’는 반찬에 불과한 시래기 무침을 위해서 강원도까지 ‘시래기 투어’를 가서 좋은 시래기를 직접 고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역시 고기와 더불어 시래기를 먹는 것이 몸에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동 ‘초정’은 오랜 업력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음식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내놓는 집이다. 시래기 밥도 좋고, 시래기 무침 등도 아주 좋다. 재래된장의 짠맛을 해결하는 것은 외식업체들의 오랜 숙제다. ‘초정’은 된장에 견과류를 첨가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비벼먹는 날된장이 짜지 않고 슴슴하다. 견과류의 고소한 맛도 싫지 않다.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의 ‘통나무집’도 시래기가 아주 좋다. ‘시래기청국장’이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다. 건물 밖에 가지런히 걸어놓는 시래기가 아주 정겹다.

서울 대치동 ‘시래옥’

서울 가산디지털단지 ‘화우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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