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는 돌과 진흙으로 다지고 외벽은 자연석으로 쌓아 견고고구려 공략의 전초기지로 삼아 거침없는 영토확장 기백 보는 듯
북동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면 백두대간 소백산 연봉이 힘찬 산줄기를 뻗어가며 솟구쳐 당당한 위용을 뽐낸다. 이미 봄기운이 완연하건만 7부 능선 위쪽의 소백산은 아직도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뒷걸음질 치는 겨울을 아쉬워하는 듯하다.
이렇듯 조망이 빼어난 이곳은 성재산(323.7미터) 정상부위를 두르고 있는 적성산성이다. 사적 265호인 적성산성(赤城山城)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때 축조되었다. 산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반달 형태를 하고 있으며 둘레는 923미터, 성내 면적은 88,648㎡나 된다. 옛 성곽은 대부분 붕괴되고 겹으로 쌓은 북동쪽 일부분만 남아 있었던 것을 최근 복원공사를 통해 옛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삼국 시대의 산성으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적성산성은 매우 견고하게 축조되어 신라의 축성 기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기초부분은 돌과 진흙으로 튼튼하게 다지고, 외벽은 자연석으로 고루 쌓았다. 또한 안쪽으로는 군사와 병마가 다닐 수 있도록 평평하게 다졌다.
이두문과 한문이 섞여 있는 단양신라적성비
1978년 1월 6일의 일이다. 이곳 산성에서 학생들과 답사를 하던 단국대학교 정영호 박물관장은 신발 바닥에 묻은 흙을 돌에 대고 털어내려고 했다. 그때 뭔가 글자가 보이는 것 같아 쌓인 눈을 털어내니 글자는 더욱 선명해졌다. 신라의 관직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신라가 고구려의 영역이던 단양을 점령한 뒤에 진흥왕이 세운 비석이 오랜 세월 동안의 잠에서 깨어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된 이 비석의 정식명칭은 '단양신라적성비'로 1979년 5월 22일 국보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높이 93㎝, 윗너비 107㎝, 아랫너비 53㎝에 이른다. 545년~551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확실한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비문 첫머리 연대부분의 4자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단단한 화강암 위에 지름 2㎝ 안팎의 글자를 음각한 비문의 전체 글자 수는 430자 내외로 추정되며 그 가운데 288자가 판독되었다. 순수한 한문식 문장이 아니라 신라식 이두문(吏讀文)과 한문이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퇴계 이황 등의 숨결이 어린 유물들도 눈길 끌어
비석이 발견된 이후 주변 일대 발굴도 이루어졌다. 그 결과 동서 12미터, 남북 9미터 범위의 직사각형 발굴구역 내에서 옛 건물터 및 비편, 기왓장, 토기 조각, 칼과 화살촉 등의 금속제 유품을 비롯하여 많은 유적과 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적성산성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1968년 6월 단양 출신 호국용사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높이 8미터의 충혼탑이 있으며, 그 아래로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0~82호로 지정된 우화교신사비, 탁오대 암각자, 복도별업 암각자 등 세 점의 유물이 있다. 우화교신사비는 1753년(영조 29) 단양천에 돌다리인 우화교를 놓고 이듬해 세운 비석으로 높이 114㎝, 너비 53㎝, 두께 16㎝에 이른다.
탁오대는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 시절, 심신의 피로를 풀기 위해 손발을 씻은 곳으로 암각자는 퇴계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복도별업(復道別業) 역시 퇴계의 친필로 단양군수 재임시 복도소라는 보를 만들고 새긴 암각자다. 이 세 유물은 1983년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기에 이르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은 단양에서 단성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탄 다음 30분 남짓 걷는다.
■ 맛있는 집
단양읍내의 맛나식당(043-422-3380)은 오소리감투와 메밀국수를 별미로 낸다. 돼지 위장인 오소리감투는 갖은 양념과 느타리버섯, 당근, 달래, 양배추, 미나리, 고추, 당면 등을 넣어 끓이는데 쫄깃쫄깃한 고기 맛과 얼큰한 국물 맛이 술안주로 제격이다. 순메밀로 직접 뽑은 면과 사골 육수, 다양한 고명이 어우러진 메밀국수는 일반 막국수와는 차별화된 색다른 맛이다. 겨울에는 따뜻한 육수에, 여름에는 시원한 얼음을 띄워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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