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환경 극복한 계단식 논 탁 트인 청정 남해바다와벚꽃·유채꽃·튤립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되다

다랭이마을의 층층대 같은 논배미들
바다를 향해 내리꽂힌 가파른 산비탈에 손바닥만한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차라리 바닷가 벼랑 끝에 매달린 갯마을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마을 주위로는 층층대 같은 논배미들이 가지런히 놓인 채 빙 둘러싸고 있다. 감탄사를 자아내는 한 폭의 그림이요, 진한 감동을 안기는 찬란한 예술 작품이다. 이렇듯 정감이 뚝뚝 묻어나는 가천 마을 다랑논은 영화 '인디언 섬머'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나그네들 눈을 즐겁게 하려고 만든 것은 물론 아니다. 척박한 자연 환경을 이겨내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100층이 넘는 다랑논을 쌓아올린 것이다. 다랑논이란 좁고 여러 층으로 된 작은 논배미, 즉 다랑이로 이루어진 논을 말한다.

가천 마을 다랑논은 삿갓배미에서 300평이 넘는 것까지 다양한 크기의 논배미로 이루어졌는데 삿갓배미에 얽힌 일화가 재미나다. 옛날 한 농부가 일을 끝내고 논을 세었더니 한 배미가 모자랐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자 그만 포기하고 집에 가려는 순간, 벗어 놓았던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한 배미가 숨어 있었다는 것. 이후 아주 작은 논배미를 삿갓배미라 부른단다.

환경부가 '자연 생태 우수 마을'로 지정하고 농촌진흥청이 '농촌 전통 테마 마을'로 지정하면서 가천 마을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제는 가천이라는 지명보다 '다랭이 마을'로 더 알려졌다(다랭이는 다랑이의 사투리). 바닷가에 자리했으면서도 배를 댈 만한 포구가 없어 어선 한 척 없지만 이 마을은 자연의 혜택을 누리며 산다.

바다를 굽어보는 암수바위가 인상적

다랭이마을 북쪽에 솟은 설흘산
청정 바다에서는 돌미역, 톳, 김, 고둥, 홍합 등의 해산물이 나고 산에는 온갖 산나물이 지천이며 다랑논에서는 마늘, 콩, 보리, 쌀, 고구마 등 농작물을 경작한다. 설흘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계류에는 귀한 참게도 서식한다.

다랭이마을은 봄철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 4월 초순에서 중순 사이에 이곳을 찾으면 청정 남해바다를 굽어보며 활짝 피어난 벚꽃과 유채꽃, 튤립, 동백꽃이 길손을 반긴다. 한 장소에서 이처럼 다양한 봄꽃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 것이다.

다랭이마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는 자웅암, 즉 암수바위로 버섯처럼 우뚝 솟구친 자태가 인상적이다. 높이 3.9미터의 암바위는 아이 밴 여성의 배를 연상시키고 높이 5.8미터의 수바위는 남성의 심벌을 빼어 닮았다. 한밤중에 남몰래 이곳을 찾아 아이 낳게 해달라고 비는 아낙네도 많다고 한다. 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얽혀 있다.

1751년(조선 영조 27년) 이 고을 현감의 꿈에 어느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우마의 통행이 잦아 괴롭다. 나를 일으켜 세우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으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현감이 아전들을 데리고 가서 꿈에서 보았던 곳을 팠더니 암수바위가 나왔다. 그래서 암바위는 누운 채로 두고 수바위만 일으켜 세웠는데 그 날이 음력 시월 스무 사흘이었다고 한다. 이후 해마다 음력 10월 23일이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제사를 지내온다.

설흘산에 올라 노도를 바라보며 김만중을 그리워하다

유채꽃과 튤립
가천 마을 북쪽에는 설흘산(488미터)이 솟아 있다. 설흘산 등산로는 여러 가닥으로 뻗어 있는데 다랭이마을에서 곧장 오르면 50분 남짓 걸린다. 제법 가파른 편이기는 하지만 길이 잘 정비되어 있고 위험한 곳도 별로 없어 누구나 오를 수 있다.

정상인 봉수대에 오른 뒤 남쪽으로 3분쯤 가면 널찍한 전망대 바위에서 빼어난 조망을 즐길 수 있다. 동북쪽으로는 금산이 위용을 뽐내고 동에서 동남쪽으로 걸친 바다에는 노도를 비롯한 작은 섬들이 점점이 박힌 채 보석처럼 빛난다. 바다와 섬들을 붉게 물들이며 솟아오르는 해돋이도 황홀한 장관이고 돌산도 쪽으로 지는 해넘이도 가슴을 뭉클 적신다.

빤히 보이는 삿갓섬 노도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서포 김만중(1637~1692년)이 귀양살이한 섬이다. 그는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기사환국 때(1689년) 이곳으로 유배되어 가슴 깊이 밀려드는 고독과 씨름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주옥 같은 작품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남겼다. 그 섬 노도로 달려가고 싶어진다. 어려울 것 없다. 정기 여객선은 없지만 벽련 마을에서 배를 타면 10분이면 닿는다.

■ 찾아가는 길

남해도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진교 나들목이나 하동 나들목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벗어나 남해대교를 건너는 코스와 사천 나들목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삼천포 방면 3번 국도-사천창선 연륙교-3번 국도-창선도를 거쳐 창선교를 건너는 길이 있다. 다랭이마을로 가려면 후자가 더 빠르다. 창선교를 건넌 다음 지족-이동-상주 방면 19번 국도-신전3거리-1024번 지방도를 거친다.

벚꽃 아래로 다랑논과 마을, 바다가 드리운다.
대중교통은 서울 남부, 진주, 부산 등지에서 남해읍으로 가는 버스를 탄 뒤에 가천 다랭이마을행 군내버스를 이용한다.

■ 맛있는 집

남해도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죽방렴에서 건져온 멸치를 손질해 반건조한 뒤 양념장에 푹 조리고 쌈을 싸먹는 멸치쌈밥을 토속음식으로 즐겼다. 어른 손가락 크기의 생멸치의 머리와 내장, 비늘을 제거한 다음, 굵은 소금을 뿌려 채반에 말리고 멸치액젓으로 맛을 낸 양념장에 푹 조리면 짭짤하고 구수하면서 영양가도 뛰어난 밑반찬이 된다. 멸치쌈밥은 여기에 상추쌈과 날된장을 곁들인다. 싱싱한 상추쌈에 밥과 조린 멸치 두어 마리를 올리고 마늘장아찌와 된장을 얹어 둘둘 말아서 입에 넣으면 진하고 구수한 향기가 입맛을 당긴다. 남해도의 여러 집 가운데 삼동면 지족리의 우리식당(055-867-0074)이 유명하다.


경상남도 민속자료 13호인 가천 암수바위
다랭이마을의 민가들
다랭이마을 농부가 밭을 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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