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김정일 ‘비밀 약속’있나?

‘밀약’ 실체 드러나면 정국 뒤흔들 핵폭탄급 위력

대규모 대북지원 ‘한반도 마샬플랜’밑그림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1차 정상회담 ‘약속’확인 자리

北 바꿔놓을 만한 대규모… 北 수차례 이행 요구

육성파일에 숨겨진 비밀

“육성(녹음)파일에 모든‘진실’이 담겨 있다.”

지난 2000년 6월 1차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그리고 2007년 10월 2차 정상회담과 이후 벌어진 일들을 지속적으로 추적해 온데 따른 추론적 결론이다.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뒷얘기를 알 정도로 북한 고위층과 인연이 깊은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과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도 기자와 공통적인 견해를 보였다.

“NLL(북방한계선)이 본질이 아니다. 진짜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기자와 이들 북한 소식통과 전문가가 동일하게 주목한 것은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이 아니라 ‘김대중-김정일 대화록’, 구체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비밀리에 한 ‘약속’이다. 이는 김 전 대통령이 김 전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제시한 것으로 대규모 대북지원 밀약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소식통과 정보 관계자에 따르면 이 ‘비밀 약속’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위원장의 정상회담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이 논란이 되고 있는 정상회담 대화록의 뿌리이자 핵심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같은 결론은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의 전제가 되는 2차 남북정상회담 자체에 근거한다. 사실 노 전 대통령과 김 전 위원장의 2차 정상회담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빅이벤트였다,

정상회담이 이뤄진 2007년 10월은 17대 대선을 앞둔,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2개월 전이다. 남북정상회담이 갖는 국내외적 의미와 파장에 비춰 북한이 퇴임을 2개월 앞둔 남한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것은 ‘의외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남북이 정상회담을 가질 만한 중대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대한 무언가’는 무엇일까? 국내외 한반도 전문가와 정통한 소식통은 앞서 언급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위원장 간의 ‘비밀 약속’을 거론한다. 이 ‘밀약’의 실체를 놓고 견해가 갈리지만 대체로 우리 정부의 대규모 북한 지원으로 분석됐다. 그것도 김대중정부와 현대그룹이 북한에 지원한 것을 훨씬 뛰어넘는 상상 이상의 규모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북 지원에 ‘비밀’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은 공개적으로 추진할 수 없거나 김 전 대통령과 김 전 위원장 만이 공유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때문으로 추정된다. 그 ‘특별한 이유’가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의 근간이 되는 육성파일에 담겨 있다는 것이 소식통의 공통된 입장이다.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은 “북한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약속한 것을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해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약속’의 내용에 대해서는 북한 지인들과의 관계 때문에 즉답을 피했지만 북한을 일거에 바꿔놓을 만한 엄청난 대북지원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정보 관계자는 “북한은 1차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약속한 것이 지켜지지 않은 것에 초조해하고 화를 냈다”면서 “2차 정상회담은 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열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역시 ‘약속’의 실체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다만 북한은 물론, 한반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대북지원이라고만 귀띔했다.

DJ-김정일 ‘비밀약속’실체는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위원장이 나는 대화에 담겨 있다는 ‘약속’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

1차 남북정상회담에 관여한 김대중정부 인사들이나 2차 정상회담에 참여한 노무현정부 사람들도 그 ‘약속’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얘기”“불순한 음모”등 제대로 모르거나 좀처럼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내 북한 소식통이나 미국 쪽 정보 관계자를 통해 ‘약속’의 윤곽을 어렴풋하게나마 접근할 수 있었다. 이들에 따르면 ‘약속’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먼저 거론했다. 내용은 대북지원인데 식량이나 비료 등 세부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북한을 바꿔놓을 만한 엄청난 규모다. 한 소식통은 ‘한반도 마샬플랜’이란 표현도 했다.

또 다른 정보통은 “한국에는 ‘약속’을 이행할 만한 재원이 있지만 대북지원은 ‘민족’ 차원에서 통일이나 공동선(共同善)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고 전했다. 그는 김대중정부가 현대그룹과 함께 대북지원한 자금이 핵무기 개발에 전용된 데에 미국 등이 불만을 갖고 있어서 김 전 대통령의 ‘약속’을 불신을 갖고 지켜봤다고 덧붙였다.

북한은 김 전 대통령의 ‘약속’에 큰 기대를 한 것 같다. 북한이 서울에서의 2차 정상회담을 운운한 것이나 이후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교류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도 ‘약속’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는 게 소식통의 전언이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북한이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에 시비를 걸고, 2002년 서해교전을 도발한 데는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작용한 측면이 있다.

이 ‘약속’ 카드는 노무현정부에서도 활용됐다. 노 전 대통령 임기말 성사된 2차 남북정상회담이 그것이다. 북한은 2차 정상회담에서 ‘약속’부터 확인했다.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은 “당시 노 전 대통령은 그 ‘약속’을 뒤늦게 알았고, 이행 가능하지만 차기 정부의 몫”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후에도 북한은 그‘약속’에 집착했고, 집요했다. 베이징의 소식통은 “북한은 경제 계획을 수립할 경우 10년, 20년을 내다본다. 김대중정부의‘약속’은 그 기반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약속’이 이행되지 않자 북한은 크게 당황했다는 게 소식통의 전언이다.

북한이 2009년 9월, 김 전 대통령 사망 때 조문단을 보낸 건 ‘약속’을 확인하기 위한 게 주목적이었다. 당시 조문 단장인 김기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와 함께 김 전 대통령 빈소를 찾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1차 정상회담의 주역인 박지원 의원 등을 만나 ‘약속’을 확인했다는 후문이다. 그 결과 약속 이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북한은 큰 충격에 빠졌다고 베이징 소식통은 전했다.

김양건 통전부장이 2007년 11월 대선을 한달 가량 앞두고 느닷없이 남한을 방문한 것도 ‘약속’과 관련 된 것으로 해석됐다. 당시 김 통전부장은 비밀리에 차기 대통령이 유력한 이명박 후보를 만났고, 그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의 ‘약속’을 거론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김만복 당시 국정원장이 대선 하루 전인 12월 18일 북한을 방문한 것도 이명박정부에서 ‘약속’이행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비핵화 정책과 대북 강경책이 주조를 이루면서 ‘약속’은 물건너 간 꼴이 됐다.

그럼에도 북한은 ‘약속’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매년 몇 차례씩 우리 정부에 6.15선언(1차 정상회담)과 10.4선언(2차 정상회담) 이행을 강조하는 것이 그 방증이다. 북한의 속내는 표면상의 남북 경협이나 교류를 원하는 게 아니라 김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이 다짐한 ‘약속’을 통 크게 이행하라는 요구다.

‘국정원 정국’의 뇌관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은밀하게 추진됐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위원장 간의 ‘약속’은 7년이 지나 2차 정상회담에서 재차 거론됐다가 잠복한 뒤 6년 만에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지난해 대선 막판에 잠시 논란을 가져왔던 ‘NLL 포기 발언’뒤에 감춰졌던 ‘약속’이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날선 ‘국정원 정국’의 혼란 속에 슬쩍 모습을 비춘 것이다.

새누리당 소속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은 3일 “대화록 원문의 공개가 잘 진행되지 않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상임위 차원에서 국정원에 보관된 녹음파일 공개를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혀 ‘약속’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때문에 최근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을 둘러싼 ‘NLL 포기’논란은 정상회담 대화록의 ‘본질’에서 벗어난 정략적 힘겨루기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에 이명박정부 시절 국정원의 대선개입 논란과 남재준 국정원장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둘러싼 여야 및 국민 사이의 갈등은 대화록에 감춰진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한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육성파일과 2차 정상회담 대화록이 계속 도마 위에 오르면서 ‘김대중-김정일 약속’의 실체도 상황에 따라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최근 여권이 ‘국정원 정국’의 돌파구로 정상회담 대화록에서 노 전 대통령의 육성파일로 옮겨 간 것이나 야당이 대화록 열람(공개)에는 동의하면서도 육성파일 공개에는 한사코 반대하는 것도 ‘약속’이 지닌 폭발력과 무관하지 않다.

두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 추진 과정과 ‘국정원 정국’에서 민주당이 보이는 행태를 보면 ‘약속’의 내용은 야권에 불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약속’에 대해 누구보다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는 민주당 박지원 의원과 문재인 의원 간의 상반된 태도도 주목된다. 박 의원은 1차 남북정상회담에 깊숙이 관여한 김 전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고, 문 의원은 2차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지낸 노 전 대통령의 분신이다.

요즘 박 의원은 민주당의 최고 정보통이자 국정원 정국을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주가를 높이고 있다. 문 의원은 국정원 사태를 계기로 친노(친노무현) 결집의 선봉장으로 나서 자신을 비롯한 친노그룹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하고 있다.

이렇듯 박ㆍ문 의원은 국정원 정국의 한 복판에서 민주당의 컨트롤 타워, 또는 저격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묘한 입장차가 눈에 띈다. 정상회담 대화록과 육성파일에 대처하는 방식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박 의원은 대화록 공개는 물론, 육성파일 공개에 강하게 반대한다. 반면 문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NLL에 대한 진의를 알리기 위해 대화록 전체를 공개하자는 입장이다. 다만 녹음 파일 공개에 대해서는 당론에 따르는 모양새다.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에서 박 의원과 문 의원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날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과 녹음기록물 등을 공개·열람하는 자료제출요구안이 재적 의원 276명 중 찬성 257명으로 가결됐다.

박 의원은 당론을 거스르고 반대표를 던졌다. 대화록 공개는 정상 외교의 신뢰성을 상실하고 남북 관계를 파탄 내는 길이라는 게 박 의원의 반대 논리다. 그러면서 같은 당 문 의원을 공격하기도 했다. 박 의원은 4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문 의원이 회의록 공개 입장을 밝힌 것을 두고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박 의원의 반대 논리는 분명 타당한 측면이 있지만 김 전 대통령의 ‘약속’이 공개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육성파일이 공개돼 김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위원장 간의 ‘약속’에 문제가 드러날 경우 전선(戰線)은 당장 김대중정부와 민주당으로 불리하게 급변할 수 있다. 박 의원 입장에선 정상회담 대화록이나 육성파일 공개는 그러한 ‘악몽’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반면 문 의원은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NLL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진의’를 알려 여권과 보수진영의 공격을 차단한다는 복안이다. 나아가 대선 이후 움추렸던 친노그룹의 재기를 도모하려는 계산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육성파일 공개도 기본적으로 ‘NLL 포기’발언이 없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게 없지만 여권이 노 전 대통령을 흠집내려 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육성파일 공개 촉각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논란은 진실 공방이 난무한 가운데 정작 ‘실체’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상태다.

지난 2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등에 대한 자료제출요구안이 가결돼 여야가 문건 열람에 나서고 있지만 열람의원 자격과 열람 범위, 공개 여부 등에 이견을 보여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있다. 벌써부터 정쟁 속에 실체 규명은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반면 장 밖에서는 문재인 의원이 참여정부 시절 정상회담에 관여한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 윤병세 외교장관 등에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구하고,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이 중대한 이적 행위를 했다는 자료를 배포하는 등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 논란은 어떻게 귀결되느냐에 따라 후폭풍이 거셀 수 있다. 하지만 정치권의 문건 위주의 규명 과정이나 양분된 여론에 비춰 명백한 결론을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육성파일은 사정이 다를 것으로 전망된다. NLL 논란 외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관련된 ‘약속’이 쟁점화할 경우 정국은 풍랑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약속’과 관련한 2차 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도 자유로울 수 없다.

서상기 의원은 3일, “정상회담 발언 해석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는 상황이 생긴다면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국정원에 보관된 녹음파일 공개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회담록 음원 파일이 공개되면 그 충격은 상상 이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권에서 말하는 ‘상상 이상의 충격’을 줄 만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육성파일이 노 전 대통령의 NLL 발언 실체를 분명히 해주거나 또 다른 ‘무엇’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무엇’이 앞서 언급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약속’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히려 NLL 발언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식어가는 상황에서 남북 정상들의 대화에서 오간 ‘약속’이 불거질 경우 김 전 대통령은 물론, 노 전 대통령과 민주당도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다. 그야말로 상상 이상의 충격인 셈이다.

최근 박지원 의원이 육성파일 ‘마사지’설을 언급하고, 박선원 참여정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 비서관이 육성파일의 왜곡 가능성을 제기하는 등 변조 의혹이 나오는 것은 실제 그럴 가능성과 함께 육성파일의 파괴력을 우려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과연 노 전 대통령의 육성파일이 만천하에 공개 될지, 그 파일에 정국을 뒤흔들 만한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