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회사원서 그룹 총수에까지… 승승장구와 몰락 그리고 부활한국을 넘어 세계로… 새신화 도전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지난달 19일 일본 유수의 일간지, 경제지는 한 사람의 퇴진 소식을 알렸다. 만화 ‘시마 시리즈’의 시마 고사쿠가 그 주인공이다. 이날 아사히 신문은 “입사 43년 만에 경영 최상부까지 올랐던,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샐러리맨이 결국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소식을 전했다.

‘시마 시리즈’는 일본의 만화가 히로카네 겐시가 1983년부터 31년째 연재하고 있는 만화로 주인공 시마 고사쿠가 사원에서 사장이 되기까지의 일대기를 풀어냈다. 70여 권의 단행본이 4,000만권 이상 팔려나갈 정도로 일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이 만화에서 시마 고사쿠는 1947년생으로 1969년 하쓰시바 전기산업에 입사해 사장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비록 만화의 인물이지만 일본 국민들은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시마 고사쿠의 성공과 실패에 촉각을 곤두세워 왔다. 2008년 5월 시마 고사쿠가 사장에 올랐을 때와 이번에 퇴임했을 때 일본의 주요 신문들이 떠들썩하게 반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일개 월급쟁이가 대기업을 이끄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시마 고사쿠가 보여준 파란만장한 삶이 사람들을 열광에 빠뜨린 것이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치고 올라간 신화적인 샐러리맨은 비단 일본 만화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신입사원에서 대기업의 수장까지 오른 살아있는 ‘샐러리맨의 신화’들이 존재한다. 물론 그중에는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시마 고사쿠처럼 결과적으로 몰락한 사람도 존재한다.

이에 <주간한국>에서는 그동안 ‘샐러리맨의 신화’로 주목돼오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으며 현재 어떤 행보를 밟고 있는지 조명해봤다. 단, 자신이 입사한 회사에서 승진을 거듭해 전문경영인이 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범위가 너무 넓어지는 까닭에 새롭게 자신의 회사를 일궈 성공적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던 인물들 위주로 살펴봤다.

선종구 전 하이마트 회장
원조 ‘샐러리맨의 신화’ 김우중

그동안 언론에서 ‘샐러리맨의 신화’라고 소개된 인물은 어림잡아 스무 명이 넘는다. 그러나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 그 원조를 묻는다면 백이면 백 을 지목할 것이다. 실제로 김 전 회장은 한때 한국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저서는 웅크려있던 수많은 청년들을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게 만들었다.

김 전 회장은 31세였던 1967년 3월 대우그룹의 전신인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연세대 졸업 이후 1960년 한성실업에 입사, 6여 년간 무역실무를 쌓은 뒤 자본금 500만원과 직원 5명으로 회사를 차린 것이다. 1973년부터 사업다각화를 추진, 건설ㆍ전자ㆍ자동차 등으로 영역을 넓힌 김 전 회장의 저돌적인 추진력에 힘입어 대우그룹은 계열사 41개와 해외법인 396개를 보유한 재계 2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며 몰락하기 시작했다. IMF외환위기로 국가신용등급이 추락하며 해외 채권자들의 상환 압력이 심해졌고 당시 부채비율이 600% 이상이던 대우그룹은 결국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들의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돌입했다. 견디다 못한 김 전 회장은 그 해 10월 중국 옌타이 자동차 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이후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 고달픈 해외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5년 8개월 동안 부평초 같은 생활을 하다 2005년 6월 귀국, 검찰 조사를 받은 김 전 회장은 2006년 11월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에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 9,253억원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를 포기하고 복역하다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7년 12월 31일 특별사면됐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
이후 김 전 회장이 신병 치료차 간간이 국내에 들어올 때마다 일각에서는 그의 재기를 조심스레 전망하고 있지만 건강 문제, 자금 문제 등 걸리는 부분이 많아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원조 ‘샐러리맨의 신화’는 사실상 무너진 셈이다.

신화에서 내려온 대우맨

대우그룹에는 김 전 회장 이외에도 또 한 명의 몰락한 ‘샐러리맨의 신화’가 있다. 바로 이다. 선 전 회장은 정통 ‘대우맨’이다. 1983년 대우전자에 입사한 선 전 회장은 대우그룹이 해체 수순을 밟던 1990년대 말까지 임원을 맡으며 최후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한 바 있다.

선 전 회장이 하이마트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대우전자 판매총괄본부장을 맡고 있던 1999년이었다. 하이마트의 전신은 1987년 설립된 한국신용유통이었다. 한국신용유통은 1983년 대한전선의 가전사업을 인수하며 대우그룹의 주력사로 떠오른 대우전자의 국내 총판권을 갖고 있던 회사였다. 이후 IMF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쪼개진 대우전자의 국내영업 부문을 합치며 하이마트로 재탄생했다. 선 전 회장은 하이마트가 설립되던 혼란기에서 직원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선 전 회장이 사장과 회장을 거치며 하이마트를 키우는 동안 대주주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러나 선 전 회장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대형 제조업체 산하의 전속매장을 제치고 국내 최대의 가전유통회사가 된 하이마트 덕분에 선 전 회장 또한 스타 경영자로 각광받았다. 선 전 회장이 이끄는 하이마트는 3조원이 넘는 매출과 300여 개의 매장을 돌파했고 2010년에는 상장에도 성공했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승승장구하던 선 전 회장이 급전직하한 것은 2011년 말 대주주인 유진그룹의 유경선 회장과 갈등이 깊어지면서부터다. 공동대표로 선임되며 하이마트 경영에 개입하려는 유 회장에 대해 선 전 회장은 불만을 토로했고 두 사람은 경영권을 놓고 일대 격돌을 벌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유 회장과의 갈등은 봉합됐지만 선 전 회장에게는 더 큰 시련이 남아있었다. 2012년 4월, 검찰이 선 전 회장을 횡령 혐의 등으로 기소한 것이다. 결국 13년 동안 지켜온 하이마트의 회장직을 내려놓게 된 선 전 회장은 롯데그룹에 인수된 하이마트와 최근까지도 힘겨운 법정싸움을 벌이고 있다.

백의종군 중인 강덕수

김우중 전 회장이나 선종구 전 회장처럼 아예 회장 자리까지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몰락 위기에 놓인 ‘샐러리맨의 신화’들도 여럿 존재한다. 과 이 그 주인공이다.

1973년 쌍용양회에서 평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강덕수 회장은 입사 28년 만인 2001년 자신이 재무책임자(CFO)로 있던 쌍용중공업을 인수했다. IMF외환위기의 여파로 외국 자본에 넘어갔던 쌍용중공업이 다시 매물로 나오자 사재 20억원을 털어 경영권을 인수한 것이다.

이후 강 회장은 범양상선(현 STX팬오션)과 대동조선(현 STX조선해양)을 잇달아 인수, 조선ㆍ해운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계열화 구조를 구축했다. 강 회장의 용단과 글로벌 조선ㆍ해운업 호황 분위기가 맞물리며 STX그룹은 초고속성장을 거듭, 설립 10여 년 만에 재계 10위권으로 성장했다. IMF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전 재산을 걸고 승부수를 던진 강 회장에 대해 세간에서는 ‘IMF가 낳은 영웅’이라는 별명까지 지어줬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
그러나 2008년의 미국발 금융위기는 강 회장과 STX그룹의 운명을 바꿔놨다. 그룹 매출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조선ㆍ해운업이 동반 불황에 빠지며 2010년부터 그룹 전체가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진 것이다. 잦은 인수ㆍ합병으로 잔뜩 불린 덩치도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됐다.

결국 채권단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강 회장은 지난해 5월 산업은행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섰다. STX에너지 지분 40%와 STX OSV 지분 전량들을 외국계 회사들에 넘긴 강 회장은 그룹의 양대 주력사 중 하나인 STX팬오션 매각도 결정했지만 해운업 불황으로 결국 불발로 그쳤다.

STX팬오션 매각에 실패하면서 강 회장은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STX조선해양까지 채권단에게 공동관리를 요청하게 됐다. 그룹 지주회사인 (주)STX를 포함해 STX엔진과 STX중공업도 모조리 자율협약 대상에 포함됐고 강 회장은 자금 지원과 기업 회생을 전제로 채권단에 보유 주식을 전부 맡기고 백의종군을 하고 있다. 여전히 채권단의 지지를 받고는 있지만 지난 2일 STX팬오션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면서 그룹의 경영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설립 당시로 회귀한 윤석금

윤석금 회장은 백과사전 외판원에서 연 매출 6조원에 재계 30위권의 대기업 수장에까지 오른 바 있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71년 한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외판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윤 회장은 입사 한 달 만에 국내 판매 1위, 1년 만에 세계 54개국 세일즈맨 중 판매왕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윤윤수 휠라코리아 회장
입사 9년 만에 상무를 끝으로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한 윤 회장은 과외금지령이 내린 것을 주목, 유명 강사들의 강의를 녹음해 판매하는 헤임인터내셔널을 1980년 설립했다. 자본금 7,000만원에 직원 7명의 이 회사가 웅진그룹의 모태인 웅진출판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후 국민소득이 높아지자 물 시장에 눈을 돌린 윤 회장은 이듬해 고가 정수기를 파는 웅진코웨이를 세워 정수기 붐을 일으켰다. IMF외환위기가 터지며 정수기 판매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지자 부담이 적은 렌털사업을 도입해 대박신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지난 32년간 생활환경가전, 건설레저, 식품, 금융, 소재, 태양광 사업까지 15개 계열사에 매출 6조원대의 그룹으로 성장한 웅진그룹 성공에는 윤 회장의 승부사 기질이 작용했다. 그러나 웅진그룹의 세를 불리려는 윤 회장의 과한 욕심은 경제위기와 맞물리며 몰락을 가져왔다. 윤 회장이 야심차게 인수한 극동건설은 전세계적인 금융위기와 건설경기 침체로 인해 수익성이 급격히 나빠졌고, 신성장동력으로 밀고 있던 태양광사업 역시 세계경기 침체와 유가하락의 직격탄을 맞아 부채비율이 높아졌다.

위기에 처한 웅진그룹은 지난해 극동건설과 웅진홀딩스의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올해부터는 웅진코웨이, 웅진패스원 등 주요 계열사를 팔아야만 했다. 웅진케미칼, 웅진에너지, 웅진식품 등 나머지 계열사에 대한 매각작업까지 마무리될 경우 웅진그룹에는 웅진씽크빅, 북센 등 출판ㆍ교육분야 사업만 남게 된다. 회사를 처음 열었던 1980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법정관리 신청으로 ‘도덕적 해이’ 논란을 빚은 데다 지난 7일 검찰로부터 2,700억원대의 사기와 횡령 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상태라 빠른 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오뚝이처럼 일어선 박병엽

‘샐러리맨의 신화’ 중에는 사실상 재기가 어려운 강덕수 회장, 윤석금 회장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처럼 위기일발의 순간에 승부수를 던지며 완전히 부활한 사람도 있다.

윤홍근 제너시스 회장
1987년 무선호출기 제조업체인 맥슨전자에 입사한 박 부회장은 3,000여 명의 직원 가운데 회장 다음으로 접대비를 많이 쓸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으며 직장생활을 했다. 쏟아지는 스카우트 제의도 불구, 박 부회장은 창업을 결심했다. 전세금을 빼 마련한 자본금 4,000만원과 직원 6명으로 무선호출기 생산업체 팬택을 설립한 것이다. 무선호출기가 빠르게 보급되던 시절 IT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박 부회장은 이후 벤처ㆍIT 호황을 발판으로 적극적으로 사업을 확장해왔다.

팬택은 1997년 5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단말기 생산을 시작하면서 휴대전화 제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박 부회장은 모토로라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당시 인기기종인 ‘스타택’을 만들며 기술력과 영업력을 쌓았다. 이후 박 부회장은 부채에 허덕이던 현대큐리텔을 2001년 인수하고 2005년에는 SK그룹 계열사였던 스카이텔레텍까지 인수하며 적극적인 사세 확장에 나섰다. 박 부회장의 도전으로 팬택은 한때 세계 7위의 휴대전화 제조사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했다.

브레이크 없이 달릴 것만 같았던 박 부회장의 성공가도에도 커다란 위기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글로벌 기업들의 견제, 환율급락, 무리한 사업확장과 차입경영이 박 부회장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결국 박 부회장은 2006년 스스로 채권단에 워크아웃을 신청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타 몰락한 ‘샐러리맨의 신화’들과 달리 박 부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박 부회장이 자신의 보유지분을 모두 내려놓고 백의종군한 끝에 팬택은 결국 5년 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최근에는 “목숨 걸고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자신의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 경쟁사인 삼성전자로부터 530억원 규모의 투자 유치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에 재계에서는 화려하게 부활에 성공한 박 부회장의 이후 행보를 기대하고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윤윤수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선종구, 윤석금, 강덕수 회장 등 국내 대표 샐러리맨 출신 회장들의 부진이 최근 몇 년간 이어지면서 재계에서는 “‘샐러리맨의 신화’는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니냐”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한 사람을 지목하며 여전히 ‘샐러리맨의 신화’는 존재한다고 답한다. 바로 이다.

윤 회장은 샐러리맨 시절부터 유명했다. 대기업 10년 차 평균 연봉이 2,000만원 남짓이던 1990년대 중반에 18억원을 받으며 샐러리맨들의 우상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해운공사(현 한진해운) 입사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윤 회장은 미국 유통업체인 J.C.페니를 거쳐 신발제조업체인 (주)화승의 수출이사로 스카우트됐다.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사 자리에서 밀려난 뒤 개인회사를 차려 수출업무에 매달리던 윤 회장은 1991년 국내 진출을 노리던 휠라 경영진의 눈에 띄어 휠라코리아의 대표이사로 발탁됐다.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휠라코리아를 전 세계 27개 지사 중 최고의 회사로 키워냄으로써 자신의 진가를 드러낸 윤 회장은 2005년 11월 휠라코리아 지분 100%를 내부경영자인수(MBO)방식으로 본사로부터 인수하며 샐러리맨의 ‘우상’에서 ‘신화’로 거듭났다. 더욱 큰 반전은 2007년 일어났다. 미국의 사모펀드인 서버러스가 휠라 본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하자 아예 본사를 사버린 것이다. 지사의 경영자가 글로벌 본사를 사버린 것은 국내에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려운 사례로 꼽힌다.

윤 회장은 2011년 독일의 아디다스와 일본의 스미토모고무 등을 제치고 미국 골프용품 업계의 상징적 기업인 아쿠시네트를 인수하며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쿠시네트 인수 때의 부채 때문에 최근 주춤하는 모양새지만 미국 경영의 빠른 정상화와 중국시장에서의 공격적인 영업 확대를 감안할 때 예상보다 빠른 회복이 기대된다. 일개 샐러리맨에서 글로벌 4대 스포츠 브랜드의 수장이 된 윤윤수 회장이 진정한 ‘샐러리맨의 신화’로 지목되는 이유다.

실업자들 흡수하며 성장한 윤홍근

은 프랜차이즈업계의 대표적인 ‘샐러리맨의 신화’로 꼽힌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시기가 도래하며 자연스럽게 프랜차이즈 창업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상황이라 윤 회장의 입지는 더욱 커지고 있다.

윤 회장은 학사장교를 1기로 제대한 뒤 1984년 미원에 입사했다. ‘기록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줄곧 두각을 나타내오던 윤 회장은 1994년 미원이 인수한 치킨 유통사 마니커의 초대 영업부장으로 임명되며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의 가능성에 눈을 떴다. 이에 윤 회장은 본사에 소형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했지만 시장 포화를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회사를 나와 자본금 5억원으로 제너시스를 창업하게 됐다.

당시 200개가 넘는 치킨 프랜차이즈가 범람했지만 윤 회장은 가맹점 끌어들이기에 매진하지 않고 물류 시스템과 가맹점 관리능력 등 초기 인프라를 갖추는데 치중했다. 이러한 윤 회장의 사전준비는 IMF외환위기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으며 빛을 발했다. 명예퇴직이라는 명목으로 대기업에서 쫓겨난 후 새로운 먹거리를 찾던 사람들에게 가장 군침 도는 창업터전으로 주목받게 된 것이다.

당시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한 사회적 불신이 팽배했을 때 업계 최초로 ‘투자비 리콜제’를 실시하고 본사 이익을 줄이면서까지 가맹점과 고통을 분담하는 등의 모습도 호평을 받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제너시스는 폭발적으로 성장, 설립 4년 만에 1,000호점을 돌파했고 지금은 4,000개가 넘는 가맹점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전 세계 30개국에 350여 개 매장을 보유, 글로벌 프랜차이즈로 우뚝 설 준비를 하고 있다.

<관련기사 > 금융업계 ‘샐러리맨 신화’ 유독 많아

오너와 월급쟁이는 유전자 자체가 다르다? 이런 통설을 거부하는 ‘샐러리맨의 신화’들은 분야별, 업종별로 분포해있다. 그 중 금융업계는 상대적으로 ‘샐러리맨의 신화’가 많은 업계로 꼽힌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이 자리잡고 있다.

동원증권에 재직할 당시 박 회장은 뛰어난 실적으로 강남 증권업계의 스타 증권맨으로 주목받았다. 가는 곳마다 전국 1위 지점을 만들며 ‘최연소’와 ‘최고’라는 수식어를 달고 산 것이다. 그러나 박 회장은 높은 연봉에 안주하지 않고 1997년 동원증권에서 함께 일하던 구재상 전 미래에셋 부회장, 최현만 미래에셋생명 부회장 등 8명의 소위 ‘박현주 사단’과 함께 미래에셋캐피탈을 설립했다.

미래에셋캐피탈에서 번 돈으로 박 회장이 세운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이듬해인 1998년 IMF구제금융으로 증권시장이 침몰했던 시기에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를 출시, 수백억원의 투자금을 모집하면서 세계적인 금융그룹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2007년 10월 출시되자마자 시중 자금을 싹쓸이하며 펀드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던 ‘인사이트 펀드’의 수익률이 이듬해 마이너스 60%까지 폭락하며 투자자들의 공분을 산 것이다. 이러한 악재를 딛고 박 회장은 미래에셋자산운용을 글로벌 운용사로 체질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최근 부진한 실적행진 때문에 “박현주의 시대는 갔다”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대표는 여러 ‘샐러리맨의 신화’들 중에서도 특이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참여정부 시절 관료직을 거친 경험이다. 혹자는 학계와 재계, 관계를 넘나드는 진 대표야말로 진정한 신화라고 꼽을 정도다.

진 대표는 국비유학생 1호로 미국에 건너가 매사추세츠주립대 전자공학 석사,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1983년부터 IBM 왓슨연구소 연구원으로 자리잡았다. 세계적인 기업의 연구원으로 명성을 떨치던 김 대표를 부른 것은 삼성전자였다. “반도체로 일본을 누르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에 돌아온 진 대표는 1999년 삼성전자 반도체총괄시스템LSI 대표이사, 2000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 총괄 대표이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삼성이 소니를 누르고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기여했다.

참여정부가 들어선 2003년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입각, 3년 동안 한국을 IT 강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일조한 진 대표는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한국정보통신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2006년 10월 IT 전문 투자회사인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를 설립, 벤처투자 전문가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진대제 펀드’라 불리는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는 불황에도 연일 성공신화를 써가며 주목을 받고 있다.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이민주 에이티넘파트너스 회장도 샐러리맨 출신의 알부자로 꼽힌다. 다나무역에 입사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이 회장은 1975년 자본금 150만원으로 완구업체인 조선무역을 창업, 미국에 인형을 수출하면서 종잣돈을 마련했다.

1997년 IMF외환위기 당시 유동성 위기에 빠진 지역 케이블 방송사들을 헐값에 인수ㆍ합병한 뒤 거대 유국轢芳獰汰?MSO)인 C&M을 설립했다. 방송시장이 커지면서 C&M의 가치는 급등했고 이 회장은 지난해 3월 맥쿼리가 주축이 된 국민유선방송투자(KCI)에 C&M지분 65%를 1조4,000억원에 매각,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후에도 이 회장은 삼성생명, 현대홈쇼핑, CJ E&M 등에 투자해 고수익을 내는 등 금융업계의 큰손으로 자리잡고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