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 조신 '집안 살림'은 옛말양팔 걷고 경영 일선 '진두지휘'… '여풍당당' 재벌가 높은 벽 허물어창업 1세대들 퇴진하면서 사회 전반에 '여풍' 불어와 재벌가 높은 담벼락 허물어

현대엘리베이터는‘2013년노사문화 대상’심사에서 대통령상에 선정돼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노사문화 우수기업 인증패 현판식을 진행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병집 이천시청 부시장, 유승우 새누리당 의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신계륜 민주당 의원,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허원 한국노총 경기지역본부 의장, 한상호 현대엘리베이터 대표, 권순평 현대엘리베이터 노조위원장)
재벌가는 그동안 며느리의 외부 활동을 제한해 왔다. 조용한 내조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바깥분'의 활동에 자칫 누를 끼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최근 이런 풍속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재벌가 며느리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조짐이 감지된 건 재벌가가 2세 체제에 접어들면서부터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미술관을 경영하거나 봉사 모임에 참여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사회 전반에 불어닥친 '여풍'은 재벌가의 높은 담벼락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직접 경영 일선에 나서 지휘봉을 휘두르는 며느리가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손'처럼 남편의 의사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도 있다. 본인의 장기를 살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이도 적지 않다. 어느 집안의 누가 치맛바람을 휘날리고 있을까.

안방 박찬 며느리들

최근 재벌가 며느리들이 경영 일선에 약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과거 사회봉사나 문화ㆍ예술 분야에서 제한적으로 활동하던 모습과 상반된다.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맏며느리인 홍미경 몽인아트센터 관장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알헤시라스 터미널 오퍼레이션 시범을 위해 펠리페 왕세자(왼쪽에서 4번째)와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왼쪽에서 5번째)이 아이패드로 만든 스위치를 작동 중에 있다.
홍 관장은 1982년 성균관대 미술교육과 재학 시절 같은 대학에 다니던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과 만나 결혼했다. 2006년부터 장 회장의 남편 고(故) 채몽인 애경그룹 창업주의 이름을 딴 몽인아트센터의 관장을 맡고 있다.

홍 관장은 그룹 내 유통 부문에서 채 총괄부회장을 '지원사격'하고 있다. 그 시작은 지난해 3월 유통 계열사인 AK에스앤디의 사업 목적에 예술품ㆍ골동품 소매업을 추가하면서다. 애경의 미술 사업은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홍 관장이 상당 부분 관여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이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부인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도 물밑에서 '경영 내조'를 하고 있다. 노 관장은 미국 시카고대학 유학 시절 최 회장을 만나 노 전 대통령 집권 시절인 1988년에 결혼했다.

노 관장은 당초 계열사 경영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워커힐 미술관을 맡으면서 미술계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으며 2000년 아트센터 나비의 관장을 맡으면서 미술관 운영에만 전념해 왔다. 노 관장이 경영에 발을 딛기 시작한 건 2012년 여수엑스포 SK텔레콤관의 총감독을 맡으면서다.

노 관장은 전시관의 건립 단계부터 관여했다. 틈만 나면 서울과 여수를 오가며 현장 상황을 직접 챙겼다는 후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 관장은 도우미 선정이나 도우미들이 입을 유니폼까지도 일일이 챙길 정도로 공을 들였다고 한다.

왼쪽부터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 장영신 애경회장
그 끝에 SK텔레콤관은 디지털 기술에 아날로그 감성을 입혔다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SK텔레콤관을 장식하는 예술 작품은 '노소영 감성'의 결집체라는 평가다. 당시 재계에선 노 관장이 추후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서리란 관측이 제기된 바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부인인 김희재씨도 비슷한 경우다. 김씨는 대학 시절 미팅을 통해 이 회장과 인연을 맺은 뒤 1년 간 연애 후 결혼에 골인했다. 이후 김씨는 별다른 경영 활동 없이 조용한 내조에 전념해왔다.

그런 김씨가 경영에 참여한 건 CJ건설이 제주와 여주에서 운영하고 있는 해슬리나인브릿지 골프장을 통해서다. 이 회장은 세계적인 골프장 건립에 관심이 많았다. 세계적인 골프 컨설턴트를 초빙하기 위해 직접 미국으로 날아갈 정도였다.

김씨 역시 골프장 건립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화여대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한 경험을 살려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동원해 골프장을 하나의 전시장으로 꾸몄다. 이는 나인브릿지CC가 세계 100대 골프장에 이름을 올리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허완구 승산그룹 회장의 부인인 김영자씨도 현재 승산레저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1969년 LG그룹에서 분리된 승산그룹은 물류ㆍ레저 전문 기업으로 운송업체와 골프장, 호텔 등을 보유하고 있다.

김영자씨 역시 이렇다 할 경영 경험은 없다. 그러나 적십자사 등에서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벌여온 축에 속한다. 김씨는 특히 연예인 강호동씨의 프랜차이즈 사업인 '육칠팔'의 대주주로 이름을 올리며 관심을 받았다.

이밖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이명희씨는 부동산 임대ㆍ관리 회사이자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인 정석기업의 이사직을 맡았다.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우경숙씨도 현대백화점 고문으로 경영활동에 참여한 바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여성의 내조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던 창업 1세대들 대부분이 퇴장하면서 재벌가에도 자연스레 '여풍'이 불고 있다"며 "특히 최근엔 재벌가 며느리들의 행보가 확대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엔 미망인이 총수로

이처럼 최근 재벌가 며느리들은 과거 내조나 사회봉사 등 제한적으로 활동하던 것과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재벌가 며느리들이 경영일선에 나선 건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엔 남편의 사망으로 지휘봉을 넘겨받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남편 사망 후 그룹 총수로 취임한 재벌가 며느리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처음이다. 장 회장은 1970년 막내 아들인 채승석 애경개발 사장을 낳은 지 3일 만에 남편 고(故) 채몽인 창업주를 심장마비로 떠나보낸 후 직접 경영 최전선에 나섰다.

장 회장은 1971년 남편 타계 1주기가 끝나자마자 경리학원에서 복식과 부기를 배우며 경영수업에 매진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2년부터 회사에 정식 출근했다. 이후 40년 이상 경영 전면에서 회사를 이끌고 있다.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도 남편을 잃고 경영에 나섰다. 양태진 국제그룹 창업주의 막내딸인 양 명예회장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던 해인 1969년에 고(故) 설원량 전 대한전선 회장과 결혼했다. 이후 35년 동안 남편을 내조하며 가정주부로 지냈다.

그러나 2004년 남편이 뇌출혈로 급작스레 세상을 뜨자 대한전선의 1대주주가 되면서 경영 전선에 나섰다. 이후 회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인 임종욱 부회장에게 맡기고 본인은 명예회장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해 왔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비슷한 경우다. 현 회장은 1976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5남 고(故)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현 회장은 결혼 후 30여년을 주부로 살아온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 그러나 졸지에 남편을 잃고 그룹 회장실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현 회장은 취임 첫해 적자 투성이인 현대그룹을 내실경영으로 탄탄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평가받았다. 현 회장은 북한의 정세로 인해 그룹 위기가 불거질 때마다 북한을 직접 방문해 문제를 해결하는 '여장부'로 정평이 나기도 했다.

최은영 현대상선 회장도 현 회장과 닮은꼴이다. 최 회장은 대학 졸업 후 바로 고(故) 조수호 전 현대상선 회장과 결혼해 가정에만 신경을 쓴 전업주부였다. 최 회장도 2006년 남편 고 조수호 전 현대상선 회장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듬해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최 회장은 이후 시아주버니들의 견제로 적지 않은 곤욕을 치러야 했지만 2007년부터 현대상선을 한진그룹에서 분리해 독립 경영을 해왔다. 그리고 전통적인 '금녀(禁女)'의 영역인 해운업계에서 활발한 경영 활동을 벌였다.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도 2004년 남편인 고(故) 양희문 대신증권 회장이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후 회장에 올랐다. 그러나 이 회장의 이력은 다른 재벌가 며느리들과 다르다. 결혼 이후 대신경제연구소 비상근 이사로 재직했다.

이 회장은 지휘봉을 든 뒤 여성 특유의 인화를 바탕으로 한 감성경영으로 증권업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면서 남성중심의 증권사 기업문화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변화시켰다는 탈바꿈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남편의 타계 뒤 회장 타이틀을 거머쥔 재벌가 며느리들은 경영 수업을 꾸준히 받아온 준비된 회장보다는 깜짝 승계자로 비춰졌다"며 "그 때마다 여성 특유의 감성과 리더십으로 입지를 굳힌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장바구니에 주식 담아 내조

앞서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며느리인 홍미경 몽인아트센터 관장은 유통사업에 관여하는 한편, 지난해 10월부터 올 1월까지 지주사인 AK홀딩스 주식 1,020주(지분율 0.01%)를 사들여 '경영 내조'를 시작했다.

이처럼 재벌가 며느리들이 주식 보유를 통해 경영 내조에 나서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LG그룹 명예회장의 막내딸이자 고 최화식 깨끗한나라 창업주의 며느리인 구미정씨는 지난해 깨끗한나라 주식 2만2,580주를 매입해 지분율을 7.52%로 높혔다.

구씨의 남편 최병민 깨끗한나라 회장은 2009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지분 확대를 해오고 있는 데 구씨의 이번 주식 매입은 최 회장에게 힘을 보태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미약품 임성기 회장의 며느리인 홍지윤, 김희준씨도 올 1월까지 주식시장을 빈번하게 오갔다. 두 며느리는 2012년 8월 임 회장으로부터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의 주식을 증여받은 후 주식 매매, 무상 신주 취득 등을 통해 지분 변동 공시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2월 현재 각각 한미사이언스 주식 60만2,122주(지분율 1.10%)를 보유하고 있다.

두산그룹 박용곤 명예회장의 맏며느리 김소영씨는 최근 두산중공업 1000주, 두산인프라코어 3000주, 두산건설 1만 주 등을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았다.

재벌가 며느리들의 주식 보유는 형제 간 승계구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웬만한 경영 내조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며느리 총수 경영능력 시험대에

향후 경영에 참여하거나 대외활동에 나서는 며느리들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관측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우려의 시선도 적지 않다. 능력을 검증받지 않은 비전문가들의 도전은 전문성이 강조되는 글로벌 경영 추세에 역행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경영 일선에 나선 며느리들이 한결같이 위기를 맞으면서 이런 주장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실제 앞서 그룹의 패권을 쥐었던 며느리들 가운데 장영신 회장을 제외하곤 모두 초라한 경영 성적표를 손에 쥐었다.

가장 심각한 건 최은영 회장이다. 한진해운은 극심한 업계 불황으로 경영난에 시달려야했다. 자금 확보를 위해 지분은 물론 국내외 터미널, 심지어 최 회장 자택까지 내놨다. 급기야 계열분리를 추진하면서 껄끄러운 관계가 됐던 한진그룹에도 손을 내밀었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10월 한진해운홀딩스가 보유한 한진해운 주식 1,920만 주를 담보로 1,500억원의 자금을 지원한 바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조 회장의 측근인 석태수 ㈜한진 사장이 한진해운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한진해운이 한진그룹으로 편입되리란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한진해운의 한진그룹 편입이 지난 6일 기정사실화됐다. 최 회장은 해운 부문 지분을 모두 대한항공에 넘기고 경영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것이다. 전업주부에서 회장님으로 변신한 최 회장의 화려한 스토리도 막을 내리게 된 셈이다.

현정은 회장도 대형 위기에 직면했다. 현대그룹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대상선이 지난 3년간 2조원이 넘는 누적 손실을 기록했다. 채권단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동안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 현대로지스틱스 등 계열사 유상증자로 버텨왔다. 그러나 유동성 확보를 위해 반야트리 호텔, 부산 신항만터미널 지분 매각 등 1조원 자구안을 내놨다. 여기에 급기야 자금줄 역할을 해온 현대증권까지 매각키로 했다.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은 그룹의 모태인 대한전선을 잃게 됐다. 2조원 수준을 투자한 급격한 사업 확장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겹치면서다. 투자자산 가치는 곤두박질쳤고 투자 과정에서 생긴 빚에 대한 이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그 끝에 대한전선은 2009년부터 현재까지 구조조정 과정을 밟고 있다. 부동산 매각과 자회사 정리 등 강도 높은 재무구조 개선 작업을 진행했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전선은 현재 매각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어룡 회장은 경영능력과 리더십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진원지는 노동조합이다. 대신증권 직원 4명은 집행부를 만들고, 지난달 25일 설립 총회를 거쳐 사무금융노동조합 대신증권지부를 결성했다. 53년만에 무노조 원칙이 깨진 셈이다.

노조는 경영진이 직원들에게 상품판매와 약정을 강요하고 업무 여직원들의 경우 사실상 승진 봉쇄, 업계 최하위의 박봉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회사 가치가 신생기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까지 만들어놓고도 직원의 해고에서 답을 찾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편 경영자로서 준비되지 않은 며느리들의 경영 진출을 '편법 승계'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며느리들의 경영 진출에 제동을 거는 요소다. 최대 주주 또는 최고경영자 자격을 얻어 향후 2~3세로의 후계구도를 잇기 위한 중간 다리 구실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재벌가 여성들은 체계적인 경영수업조차 받지 않은 상황에서 수조원대를 주무르는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며 "이 경우 자칫 수많은 임직원들은 물론 한국 경제에 불행을 초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송응철기자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