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유럽을 뒤집어 놓은 중국發 재앙



■ 흑사병

필립 지글러 지음 한은경 옮김 한길사 펴냄.

인류 역사에서 전염병은 낯선 일이 아니다. 3세기 나병에서부터 14세기 흑사병, 16세기 매독, 17~18세기 천연두, 19세기 결핵, 20세기 에이즈까지. 그리고 올해 봄에는 또 다른 ‘괴질’이 나타났다.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라고 이름붙여진 이 괴질은 중국에서 시작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며 지구촌을 강타했다.

이 책은 인류를 위기에 몰아넣었던 전염병 중 흑사병에 관한 보고서다. 항생제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의 몇 세기 동안에는 항상 질병들이 만연해 있었다. 전염병은 끊이지 않았고, 보통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40세를 넘기기 힘들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14세기 중반 전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은 인간의 역사에서 신의 저주라 불릴 만큼 끔찍한 재앙이었다. 이전의 전염병이 단기간, 그것도 한정된 지역에서 기승을 부린 것에 반해 흑사병은 온 유럽에 걸쳐 퍼졌고,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죽을 만큼 그 결과가 참혹했다.

책은 중국에서 시작된 재앙의 조짐이 어떻게 유럽 대륙에 닿았는지, 이 병의 이름이 왜 흑사병이 됐는지를 드라마처럼 펼쳐나간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를 거친 병마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 병에 반응하는 나라와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려나간다.

엄청난 재앙 앞에서 어떤 이는 희망을 접은 채 인생을 지레 포기했고, 어떤 이는 재앙을 막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헛된 치료법이 난무하고 병이 도착하지 않은 마을은 다른 지방에 대한 극도의 이기심을 보였다. 독일에서는 재앙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유대인에게 몰려 그들에게 그 피값을 물리는 일도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먹고 마시자’는 방탕한 분위기가 넘쳐나기도 했다.

흑사병이 물러간 뒤 세상은 달라졌다.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졌고, 농민의 이탈로 장원 체제가 서서히 몰락했으며, 영주가 직접 경작하기 어렵게 된 농경지는 목축지로 변해갔다.

또 라틴어 중심의 교육이 각국의 모국어로 대체됐고, 교회 권위도 크게 실추했다. 말 그대로 사회ㆍ경제적인 대변화가 이어졌던 것이다. “흑사병이 없었다면 14세기 이후 유럽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 매우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지은이가 내린 결론이다.

최성욱 기자


입력시간 : 2003-11-12 17:58


최성욱 기자 feel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