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암으로 두 눈 실명, 독일서 활동하며 세계적 음악가로 성장

맹인 피아니스트 다케시 가케하시, 영혼이 빚어낸 천상의 소리
소아암으로 두 눈 실명, 독일서 활동하며 세계적 음악가로 성장

“도망치면 더 슬퍼지고 화만 날 뿐이죠. 잘 안 되면 다시 연습하는 수 밖에요.” 까만 안경알이 가뜩이나 흰 피부를 더욱 하얗게 만든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청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사롭지 않은 울림을 띤다.

세계 곳곳에 화제를 뿌리고 있는 일본의 맹인 피아니스트 가케하시 다케시(26ㆍ梯降之)가 첫 내한 공연을 가졌다. 10월 31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새까만 안경에 안내원의 손을 잡고 피아노 앞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1,200여 관객들은 가늘고 긴 손에서 그렇듯 영롱한 소리가 흘러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콘체르토가 천상의 소리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1시간 55분 동안의 연주가 다 끝나고도, 사람들은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한국에 오기 직전인 10월 24~28일 독일에서 다섯 차례 가졌던 콘서트와 같은 레퍼터리였다(프랑스 로아르 국립관현악단 반주ㆍ프란츠 그라마 지휘).

공연 전, 연습실에서 본 가케하시는 훌쩍한 키에 유달리 수줍음을 잘 타는 청년이었다. “한국 음식, 특히 잡탕을 무척 좋아해요. 이번 첫 방한길에 너무 많이 먹었더니 마늘 알레르기가 생겨 조금 고생했죠.”그러나 마늘 알레르기는 자취를 감추고, 처음 와 본 한국 관객의 열띤 호응과 우면산의 맑은 공기가 더 큰 힘을 발휘한 것이다.

2002년 NHK가 만든 ‘한일 교류 프로그램’에서 일본 외무성 추천으로 첼리스트 주자 정명화와 협연한 이래 부쩍 오고 싶었던 곳이다. 가케하시와 정씨 일가와의 인연은 프랑스에서 활동중인 지휘자 정명훈에게로 이어졌다. “언젠가 함께 연주하자고 제의해 왔어요.” 자신을 인정했다는 징표라며 은근히 자부한다.


오늘을 있게 한 어머니의 사랑

비올라 주자인 아버지 다케노리(60ㆍ孝則)와 소프라노 가수인 어머니 유키코(59ㆍ侑子)씨 사이에 태어난 그는 1994년 독일 에팅겐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듬해 미국서의 스트라빈스키 영 피아노 콩쿠르에서 2등, 1998년 프랑스의 롱 티보 국제 콩쿠르 1위 없는 대상, 2000년 국제 쇼팽 콩쿠르 특별상 등으로 명성을 이어 오고 있다.

자식 세 명 중 다케시는 특이한 존재였다. 그가 보지 못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생후 1달 뒤였다. 빛에 전혀 감응하지 못 했다. 소아암 때문이었다. 항암 치료의 고통에 밤새도록 잠을 못 이뤄야 했다. “그 때마다 클래식 레코드를 틀어주면 신기하게도 가라앉는 것 같더군요.” 마침내 13살때, 왼쪽눈까지 암이 번져 눈을 들어낼 수 밖에 없었다. 두번째 수술이었다.

그가 특이했던 것은 앞을 보지 못해서 뿐만은 아니다. 모두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들 했지만, 듣고 난 뒤 바로 연주하는 것은 그뿐이었다. “두살때 누나가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것을 듣더니 반주부를 정확히 따라 해 내더군요. 비록 가운데 손가락 하나만으로 하는 연주였지만.” 함께 다니며 일거수일투족 도움을 주는 어머니의 기억이다.

그가 정식 피아노 레슨을 받은 것은 네 살 반때. “손가락 하나로만 건반을 두드리는 이상한 버릇을 고치는 데 1달이 꼬박 걸렸어요.”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뒤였다. 모든 것을 머리로 외워서 해야 한다는 현실적 한계는 엄청난 난관으로 다가왔던 것.

맹인에게 레슨 한 경험이 있던 맨 첫 교사는 쉬운 곡을 대상으로 테이프에 녹음해 주는 방식과 점자 악보로 옮기는 방식을 병행했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에는 점자 악보를 위주로 했으나, 당장 한계가 드러났다. 모두들 아는 곡뿐이어서, 새로운 작품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점자 악보화 돼 있지 못 한 작품을 점자 악보화하는 데는 보통 3~6개월 걸릴 뿐더러, 오타도 많았다. “정작 하고 싶었던 것은 새롭게 지어진 곡이었는데, 그것은 더 더욱 꿈도 못 꿀 형편이었어요.”

그의 오늘은 음악?하는 어머니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현대 음악이나 비주류 음악은 CD로도 구할 수 없어, 어머니가 악상 기호 등 악보를 일일이 설명해 주었다. 독특한 학습법이 깊어지다 보니, 악보가 환하게 들어 오는 경지에 달했다. “협주곡의 경우는 10번 정도 들으면 완전히 습득됐고, 곡이 익숙해지면 즉흥 연주까지 가능해졌죠.” 지금 그는 아무리 난해한 곡이라도 CD로 네 번 들으면 다 외울 수 있다.

롱 티보 콩쿠르의 경우, 콩쿠르을 위해 작곡된 신작을 연주해야 했다. 악보로 25쪽이나 되는 분량이었는데, 1달전에야 겨우 도착했다. 현대 음악 답게 박자 변화도 심했을 뿐더러, 딴 콩쿠르 준비마저 겹친 때였다. 레슨 선생마저 딴 일로 바빴던 탓에 , 혼자 해 낸 셈이었다.


피아노는 세상으로 향하는 길

다케시의 영특함은 어려서부터 빛을 발했다. 삼형제 중 바로 듣고 연주한 것은 그뿐이었다고 어머니는 말한다. “음악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나 현대 음악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작곡가의 메시지와 정서가 느껴지는 현대 음악이라면 좋죠.” 현대음악의 고전, 셴베르크까지는 좋다고. 앞으로는 슈만, 쇼팽 등 여지껏 해 보지 않은 곡을 더 파고 싶다 한다. “나 자신의 틀을 깨는 곡들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연주란 작곡자와 연주자 사이의 독특한 대화법이다. 손가락 재주만으로는 경지에 달할 수 없다. 다케시의 연주가 감동을 주는 것은 주어진 텍스트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것과 대화를 나누려는 노력 덕택이다. “작곡 당시의 상황을 아는 데는 작곡가의 편지를 많이 읽는 게 최고죠.” 여려서 점자를 뗀 호기심 많은 소년에게 점자책이란 넓은 세계로 향해 열린 창이었다.

고전주의 음악을 중심으로 레퍼터리를 확보한 그에게는 곳곳에서 콘서트 초청이 온다. 피아노는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다. 지금껏 그는 콩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훌륭하게 입증해 왔다. 그러나 요즘 생각에 변화가 왔다. “이제 무대에서의 연주에 더 힘 쓰고 싶어요. 콩쿨이란 게, 전 콩쿨보다 더 높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내모는 것 같아서요.”

그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지식에 항상 목말라 있다. 항상 책을‘본다’. “소설ㆍ에세이ㆍ옛 신문을 주로, 과학이나 우주에 관한 책은 기분 전환으로 읽어요.” 그러다 바깥이 그리워지면 숲과 강이 있는 곳으로 산책을 나간다. 그는 물체의 형상을 어디까지 알까?

“태어나서 1달 뒤, 초점이 없는 걸 보고는 눈에 이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빛을 겨우 쫓아 가는 정도였으니. 그러다 수술을 받은 것은 생후 4개월째였어요.” 어머니에게는 그 사이의 얼마 동안이 가슴 아린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을 터다. 얼굴을 바싹 들이댄 어머니가 씩 웃어 주면 아이도 웃었던 것은 그 때뿐이었다. 그 지겹던 방사선 치료로도 과거를 되찾을 수 없었다.


키와 마음으로 듣는 자연의 소리

“밖에 나가 있으면 향기, 새소리 같은 것과 함께 여러 느낌이 밀려 오죠.고요함, 가을의 외로움 같은 것 말예요. 봄에는, 새싹 돋는 소리도 들려요.” 그는 분명 더 멀리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말은 이 청년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게 한다. “나는 항상 좌절해요.”

“머릿속 생각이 정리 안 될 때, 내가 앞을 못 봐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연주하고 난 뒤에 아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 때 말이죠.” 그럴 때는? “다시 연습하는 수밖에 없죠. 여기서 도망치면 더 슬퍼지고 화만 날 뿐이니까요.” 가장 기쁠 때는? “무대 연주 중 너무 신날 때, 연주에 완전히 몰입할 때, 관객의 반응이 폭발할 때라고. 그럼, 가장 슬펐던 순간은?

“몸이 아팠을 때였죠.” 두 번의 수술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음의 아픔보다 더 했을까?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등학교로 갈 때, 학교측의 입학 불가 통보는 당시 살던 지역 사회의 이슈였다. 초등학교 입학때도 벌어졌던 서명 운동이 이번에는 더 큰 차원으로 펼쳐졌다.중졸 이후, 그는 독일 빈에서 살며 음악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이번 내한 연주 후에는 핀란드와 일본에서의 연주가 기다린다. 지금까지 독주집은 5장, 협연 음반은 콩쿠르 실황으로 2장 있다.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3-11-13 14:47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