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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리기'로 엿보기 욕구 자극
프라이버시 보호 명목, 상업적의도 짙은 의혹 풍기기



△ 영화배우 겸 가수 함소원은 섹스 비디오의 실제 인물이 'H'라고 보도되면서 비공개적으로 자신이 지목되자 기자회견을 자청, 결백을 주장하기도 했다.



‘왕년의 톱스타 K양, 해외원정 도박 내사’, ‘톱스타 A양 술자리에서 남친에 맞은 사연’, ‘100억 괴자금 P양’, ‘전 C 그룹 회장 , 충격적인 여자 연예인 J, L, K와의 애정행각’, ‘남자 킬러 A양, 뭇 남성 무차별 육탄 공세’

최근 며칠 사이 스포츠지나 일간지 그리고 잡지, 방송 등에 집중적으로 소개된 뉴스 제목들이다. 매체마다 표현들은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공통된 것은 사람을 지칭하는 이니셜을 사용한 것이고 이들이 연예인이라는 점이다.

그야말로 이니셜 범람 시대다. 이니셜로 말하지 않으면 기사가 안되는 것처럼 어떤 신문을 펼치더라도 반드시 이니셜은 등장한다. 대중들은 이니셜에 대한 퍼즐 게임을 벌이며 호기심을 증폭시키고 이내 이니셜의 실명과 실체 찾기에 돌입한다.

보도가 나간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실명들의 모범 답안을 쥔 사람은 중요한 정보라도 입수한 듯 다른 이에게 자랑삼아 이니셜의 실체를 밝혀준다. 아예 인터넷에는 이니셜의 모범 답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유통된다.

연예인을 사이에 두고 언론과 대중이 이니셜을 통한 교감 시대에 접어 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예인 이니셜의 과다 사용 현상은 우리의 특수한 상황이다. 미국이나 일본의 연예인, 스타들에 대한 이니셜 명기 현상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다.

우리 사회에 한때 이니셜로 대변되는 시절이 있었다. 특히 정치권에서 DJ, YS, JP로 대변되는 3김 시대에는 이들의 이름보다 이니셜이 더 보편화했고, 이것은 하나의 정치의 상징이자 정치 문화로 자리잡았다. 이때 이니셜이 대량 유통된 것은 이름이 갖는 의미보다 더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하고 신화화하는 기제로 활용됐다.

이러한 이니셜은 박정희 독재 정권의 폭압적인 체제하에서 강요된 은둔의 세월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한편으로는 권위주의 시대에 이니셜을 사용한 또 다른 이유는 언로가 차단되고 표현의 자유가 위축돼 있어서 용기 있는 취재원이나 부당한 정보를 외부에 알리는 내부자의 보호 장치로 활용된 긍정적인 도구이기도 했다.


자극적 보도 위한 수단의 도구



하지만 이제는 이니셜의 그러한 기능은 사라졌다. 근래 들어 프라이버시(사생활) 침해의 소지가 있거나 특정한 혐의나 용의자로 지목됐지만 재판의 판결이 나오기 전에 사용하던 것이 성(姓)만을 거명한 기사였고 보도였다. 박모씨, 김모군, 이모양 등등처럼. 하지만 최근 들어 영어 이니셜을 사용하며 기사를 쓰거나 방송 보도하는 경우가 급격히 늘면서 영어 이니셜 시대를 열었다.

유독 이니셜을 많이 사용하는 곳이 연예계와 연예인과 관련된 대중매체의 보도다. 여기서의 이니셜은 또 다른 의미와 기능을 갖고 있다. 이니셜 사용의 원래 목적인 프라이버시 보호나 취재원 보호가 아니다.

연예계와 연예인에 대한 이니셜 통용 시대가 열린 가장 큰 원인은 연예인 파워의 신장에서 찾을 수 있다. 연예인의 위상과 파워가 증대되고 언론과 인권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연예인들이 그 동안 일방적으로 불리한 언론 보도를 언론사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수용하던 관행에서 벗어났다.

연예인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거나 잘못된 기사에 대한 정정 보도나 명예훼손 소송을 당당하게 그리고 빈번하게 제기하면서 신문과 방송이 보도로 인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이니셜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매체가 급증하고 인터넷의 발전으로 매체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연예계의 소문과 확인되지 않는 추문, 그리고 카더라 통신(사실 확인되지 않은 채 유언비어로 떠도는 것)을 무리하게 기사화 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진 것도 이니셜 사용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니셜의 범람은 또한 대중매체가 지극히 선정적이고 부정적인 사건이나 현상을 보도해 독자나 시청자의 눈길을 끌려는 얄팍한 상술에도 원인이 있다. ‘화장실에서 가수 A군과 탤런트 B양 섹스’ ‘톱스타 C군 수많은 여자 연예인과 섹스’ 등처럼 선정의 극치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이니셜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독자와 시청자의 엿보기(관음증) 욕구와 궁금증을 유발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판매나 시청률로 이어가려는 상업적인 의도가 구체화 된 것도 이니셜 홍수 시대를 연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다.

△ 섹스 비디오 파문을 이겨내고 최근 재기한 가수 박지영. 그녀도 맨 처음 이니셜로 스포츠신문 등에 오르내리기 시작, 호기심에 찬 세인들의 폭발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일단 기사나 보도가 P양, K씨, J양 등으로 시작되면 사람들은 이니셜의 실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것은 인터넷 포털사이트나 언론사 사이트를 들어가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이니셜을 등장시킨 기사나 내용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보도되면 그 즉시 이니셜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에 대한 문의와 나름의 실체 확인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을 타고 대량 유통되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 당장 아무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궁금증을 풀어주는 코너를 찾으면 이니셜에 대한 문의가 폭주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니셜 실체 쉽게 드러나



여기서 재미나는 현상은 기사나 보도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전후 맥락을 보면 이니셜의 실체를 금세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실제 인물을 보호하고 사생활을 지켜주기 위한 이니셜의 사용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일단 이니셜로 보도되면 다양한 정보 채널을 가동해 실체를 알아낸 사람들이 인터넷의 각종 사이트에 이니셜의 실명을 올리기 때문에 금세 이니셜의 주인공이 세상에 알려지게 돼 있다. 이니셜의 원래 기능은 금세 상실되고 있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겠다. ‘P모양은 90년대 중반 모방송사 슈퍼 탤런트 선발대회에 입상을 계기로 연예계에 데뷔해 곧바로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고 영화 두 편에 출연했으며 오락 프로그램의 코너 진행을 맡아….’ 여기서 1990년대 슈퍼 탤런트라고 명명해 탤런트를 공채한 방송사는 한 군데밖에 없었다. 바로 KBS다. 1990년대 중반이라는 표현과 곧바로 주인공을 맡았다는 표현에서 P양의 실체를 이내 드러난다.

이처럼 무분별한 연예인과 연예계와 관련한 이니셜의 사용은 적지 않은 문제를 파생시키고 있다. 이니셜의 사용 목적인 사건 당사자와 취재원의 인권보호와 사생활 지키기는 온데 갖데 없고 오히려 당사자의 명예 훼손의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니셜의 남용은 연예인과 연예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심화로 이어진다.

연예인들이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상당수 연예인들은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이니셜 사용이 연예인들에 대한 인상을 좋지 않게 심어주고 엉뚱하게 오인 받아 피해를 보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일부 연예인들은 이니셜의 실제 주인공이 아닌데도 일반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이니셜의 실제 인물로 단정하려는 정보를 올리는 바람에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보고 있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사건과 소문 수준의 내용을 보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는 이니셜의 범람은 당장은 독자나 시청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으나 결국 이것은 보도 내용과 기사의 신뢰성을 무너뜨려 대중매체의 불신으로 이어진다. 이니셜의 이용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의 대표적인 경우다.

실명이 사라지는 사회는 분명 불행한 사회다. 이니셜은 당당함과 정당함 그리고 신뢰가 사라지는 곳에서 자라난다. 숨김과 은폐라는 어두운 논리의 총체가 이니셜로 집약돼 나타나는 현상을 우리는 지금 너무나 자주 목도하고 있다. 비리와 부정, 선정과 자극, 과장이 난무하는 곳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이니셜이다.

지금 연예계에 이니셜이 난무하고 있다. 이니셜이 범람하는 연예계는 분명 대중의 바람과 어긋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연예계의 문제점 만큼 대중매체도 이니셜을 조장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니셜이 사라지는 그날이 올 수 있을까. 내일은 신문과 방송에서 이니셜로 된 기사나 보도를 보지 않았으면 싶은데, 이게 정말 허망한 소망일까?



배국남 knbae24@hanmail.net


입력시간 : 2003-11-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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