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앨범 'Dreyfus Night In Paris' 발매

[재즈 프레소] 페트뤼시아니를 다시 만난다
라이브 앨범 'Dreyfus Night In Paris' 발매

미셸 페트뤼시아니(Michel Petrucciani). 그는 기적이다.

1997년 11월 27일. 그는 서울의 한 특급 호텔 컨벤션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내한 공연을 치렀다. 말로만 듣던 그의 연주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딱 1m 되는 키에다 양팔에 보조기를 착용한 상태의 불안한 걸음으로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페달까지 발이 닿지 못하는 터라, 페달에는 그의 짧은 다리로 작동할 수 있게 보조 막대가 설치돼 있었다. 너무나도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일단 연주를 시작하자, 피아노 솔로의 극한을 보여 주었다. 스탠더드를 위주로 해 자유로운 즉흥을 구사해 가며 쇼팽과 드뷔시를 뺨치는 현란하고도 영롱한 선율을 펼쳤다. 1994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으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의 최고 단계인 쉬발리에를 수여 받았던 실력이 아니던가. 1999년 1월, 그는 36세로 숨을 거뒀다. 골부전증(osteogenesis imperfecta)이라는 희귀병탓으로 가뜩이나 좁아진 흉곽에 균이 침투해 중증 폐렴으로 번지는 바람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다시 왔다. 최근 국내 발매된 그의 라이브 앨범 ‘Dreyfus Night In Paris’는 고인이 돼 버린 그를 문득 체감시켜 주는 동시에, 육체의 질곡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 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마커스 밀러(베이스), 케니 개릿(색소폰) 등 쟁쟁한 주자들과 악기로 나누는 대화가 손에 잡힐 듯 하다(C&L).

연주 하루 전, 그가 묵던 호텔방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토크 쇼의 메인 게스트로 즐겨 초청될 만큼, 그는 달변에다 명확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늘이란 전혀 없었다. 승마와 바이올린에 능한 아들이 둘 있는데, 당시 부인과는 별거중이라며 묻지도 않은 말을 하기도 했을 정도다.

대담을 끝내고 돌아서는 기자에게 먼저 악수를 청한 그였다. 아기손이나 다름 없는 조막손이었지만, 대단한 악력이 그대로 느껴졌다. 한국 공연장에서, 그 힘은 예기치 못 한 사태로 이어 졌다. 피아노 현이 끊어 지고야 만 것이다. 그러나 그의 즉흥적 순발력 덕에, 사람들은 공연이 끝나서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 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두고 “프랑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재즈”라고 정의했다. 듀크 엘링튼-아트 테이텀-빌 에번스 등으로 이어지는 재즈 피아니즘이 한 쪽 축이고, 드뷔시와 라벨 등이 대표하는 낭만주의는 또 다른 축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수업 과정이 두 가지가 어우러진 것이었다.

재즈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 덕택에 어려서부터 재즈가 생활의 일부였던 그는 맨 처음 클래식에서 출발했다. 하루에 8~9시간씩 피아노 연습에 매달린 덕에 11살때는 22세의 청년과 실력을 겨룰 정도였다. 인터뷰 당시도 매일 4~5시간은 연습을 한다고 하던 그였다. 그러나 불구자였던 그에게 클래식은 멍에였다. “학교는 내가 밖에 나가서 연주하는 것을 꺼렸어요.” 악보대로 연주할 것만을 요구하는 콘서바토리식의 음악관은 진작부터 그의 자유스런 음악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재즈와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그렇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는 재즈 특유의 스윙감을 일컬어 ‘자유의 리듬’이라고 했다.

당시 독일 ZDF-TV의 버라이어티쇼에서 연주를 구사하며 입담을 펼친다는 그는 1년 내내 쉴 겨를이 없었다. 파리와 뉴욕에서 번갈아 살며 살았는데,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끊임없이 콘서트 요청이 들어 온다고 했다. 당시 공연 직후인 12월에 잡힌 일정만 해도 독일-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스페인-영국 등지라고 했다.

1997년의 내한 연주회 당시 그는 말없이 수익금 전액을 장애인 돕기 기금으로 내 놓아, 잔잔한 화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엄청난 선물을 하고 간 셈이다. 내한 당시, 그의 존재에 대해 잘 몰랐던 국내 언론들이 내비쳤던 관심의 분량은 손바닥만한 예고 기사가 고작이었다. 쓸쓸한 풍경이었다.

<참고>그는 프랑스 사람이다. 그의 성이 이탈리아계이긴 하지만 그는 프랑스 사람인 만큼 불어식 발음인 페트뤼시아니로 읽히는 게 옳다. 그럼에도 음반 기획사 등지의 자료에서는 ‘페트루치아니’로 표기돼 있다. 아무래도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철자가 비슷하니, 발음도 그와 유사할 것이라고 짐작한 탓? 어쨌거나 지금도 그는 페트루치아니라며 오독되고 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4-01-16 16:31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