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문화적 주체성과 유연성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이후 수입과 방송이 금지되었던 일본의 대중문화가 2004년을 맞아 사실상 전면 개방 되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개방 검토 지시 이후로 단계적인 개방을 해 왔지만, 지난 3차 개방까지는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만 개봉 가능하며 일본어 가사가 들어간 음악은 방송할 수 없다는 규정이 적용되었다. 여전히 몇 가지 유보사항과 심의절차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영화 음반 게임 방송 분야의 일본문화의 자유로운 수입과 방송이 가능해졌다.

그 동안 일본 대중 문화 개방에 대한 찬반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 졌다. 반대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과거 역사와 관련된 국민 정서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일본 문화의 선정성과 폭력성이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 거리였다. 그리고 막대한 자본을 대동한 일본의 문화 산업이 한국의 대중 문화 지형을 황폐화시킬 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반면에 찬성하는 논의도 적지 않았다. 인터넷이 일상화된 시대에 현실적으로 일본 대중 문화 가운데 들어 올 것은 이미 다 들어 와 있으며, 역사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현안 때문에 대중문화의 수입과 유통이 금지된다는 것은 별다른 정당성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폐쇄적인 문화적 태도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배양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의 체결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대중문화의 수입 금지는 별다른 의미나 정당성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그 동안의 논의들은 단순히 찬성과 반대에 대한 의사 표명이 아니라, 일본 문화 수입을 앞두고 우리가 고려해야 할 문제점들을 짚어 보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수입 개방이 이루어진 지금부터이다. 반대를 해왔던 사람들의 걱정과 우려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찬성했던 사람들의 희망처럼 당장에 문화적 다양성이 갖추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ㆍ외교ㆍ역사 등의 문제를 적절하게 고려하면서, 문화적 차원에서 일본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나가야 한다는 과제가 우리 사회에 던져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차 개방 이후 한 달 가량의 시간이 지났지만, 일본 문화 개방과 관련된 주목할 만한 반응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독도 우표와 관련된 외교 문제 등과 같은 민감한 사안들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 문화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체계적으로 전달되지 못한 상황도 주요한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일본문화는 법률적인 금지와 실제적인 유통이라는 이원적인 구조 속에서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소개되고 있는 수준은 마니아층을 자극하기에는 현저하게 약하고 일반 대중이 접근하기에는 참으로 막연한 상황에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대중문화가 한국 사회에 연착륙할 수 있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아닐까 한다. 첫 번째는 역사적인 평가가 이루어진 고전물과 지난 시절의 향수를 동반하는 추억물이다. 영화팬들은 일본의 세계적인 감독 오즈 야스시로나 구로자와 아키라의 DVD를 소장하고자 할 것이고, 젊은 시절에 ‘안전지대’나 ‘X-japan’ 등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앨범을 찾게 될 것 같다. 그리고 학원에서 일본어 교재로 ‘도쿄 러브스토리’를 보았던 사람들은 케이블 방송에서 젊은 시절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는 시장 경쟁력이 높은 아이돌(idol) 스타를 내세우는 경우이다.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보이밴드나 여가수들이 대상이 될 텐데, 17세에 일본 최고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했던 우타다 히카루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세 번째는 일본의 메트로폴리탄적인 문화이다. 최근에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시부야 계열의 음악처럼, 1990년대 이후로 일본에서는 탈(脫)일본적이고 중성적인 문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시부야 계열의 음악은 일본적인 고유함이 아니라 도시적인 퓨전의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인 거부감이 적은 편이다.

과거와 관련된 역사적인 경험은 잊어버릴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현안을, 문화의 영역과 혼동하지 않고 구분해서 대응하는 일은 성숙한 사회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사항이다. 외국의 문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좋은 작품들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해당 사회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또한 다양한 문화의 수용 과정은 자국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생산적인 맥락을 구성한다. 문화적 주체성은 유연성과 다양성 그리고 비판 정신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배양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문화 개방은 한국의 문화적 역량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동식 문학평론가


입력시간 : 2004-01-27 20:13


김동식 문학평론가 tympa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