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다시 만난 서태지


서태지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인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신화가 되어 버린 하얀 얼굴의 미소년, 그리고 신화 이후를 힘겹게 살아가야 할 사람. 아마도 그는 스스로 신화가 되고자 한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주류 질서를 전복하는 대항문화의 전사(戰士)로 규정하거나,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를 복음처럼 들려줄 전령사이기를 기대했다. 음악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고 공언한 적이 없건만, 많은 사람들은 어디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해 보라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시기와 선망이 엇갈리는 시선의 체계 속에서 그는 그렇게 현대의 신화로 자리를 잡았다. 신화의 주인공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을 거쳐 고향(근원)으로 되돌아오듯이, 서태지 역시 은퇴와 잠적으로 대변되는 ‘상징적인 죽음’을 거치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 주어졌던 것이리라.

혹시 서태지 신화의 연장선 위에 놓인 후일담과 같은 음악은 아닐까. 3년 4개월 만에 발표된 7집 앨범 ‘라이브 와이어’를 손에 집어 들면서 가졌던 생각이다. 만약 이번 앨범이 낡은 신화의 확대재생산에 머물게 된다면, 서태지는 ‘안 좋은 추억’ 정도로 급격하게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앨범에는 신화의 주박(呪縛)으로부터 자유와 독립을 선언한 또 다른 서태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었다. 사회의 억압에 분노하며 아련한 추억에 눈물짓는 청년, 12개의 음으로 표현되는 자유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음악인의 모습이 그것이었다.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과 같은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음악으로 내놓은 셈이다.

오랜 동안 공을 들인 앨범답게 구성력과 표현력이 대단히 뛰어나다. 초기 펑크의 원초적 건강성, 하드코어의 분노와 절규, 얼터너티브 록의 자기성찰적인 태도, 모던록의 감성적 멜로디 라인 등이 뒤섞여 있는 혼종(混種)적인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노래들이 4개의 코드만을 사용하고 있지만, 서태지 특유의 멜로디와 하드코어적인 사운드가 빚어내는 기묘한 앙상블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또한 노랫말들은 사회비판과 자기반성 사이의 절묘한 균형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인 모순이나 억압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나 비판도 없고, 내면의 추억을 더듬어가지만 값싼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반성과 사회비판이 서로 매개되면서, 진정성과 자기모순이 솔직하게 표현된다. “내 영혼을 금액에 매겨 팔”(f.m.business)아야 하는 현실과, “엄마 내겐 이 삶이 왜 이리 벅차죠. 변해간 나의 벌인가요.”(zero)라는 내면이 서로 엇갈린다. 하지만 “내 열두 개 멜로디로 난 오늘 경계선을 넘”(live wire)겠다는 진정성이 현실과 내면의 모순을 감싸 안는다.

그렇다면 자기반성과 사회비판이 서로 매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여성성의 발견과 도입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한다. 일반적으로 하드코어는 폭력적인 남성성(꾸짖는 아버지-매를 든 선생님-억압적인 국가)과 대결하면서 닮아갈 수밖에 없다는 오이디푸스적 위기를 재현하는 장르이다. 하드코어에서 남성성의 가학적인 분출이나 피학적인 동일화를 자주 발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해결책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더욱 강한 근육과 정치적 태도로 재무장해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성을 수용함으로써 남성적 나르시시즘을 넘어선 지점에서 자기배려를 추구하는 것이다. 서태지가 나아간 길은 아마도 후자의 것으로 보인다. 감성적 멜로디의 도입은, 단지 대중성의 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성의 도입을 통한 내면의 발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여성이 겪어야 하는 폭력적인 상황에 대한 노래(victim)나 소녀와 어머니를 청자로 상정한 노래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성을 (재)도입한 지점이 다름 아닌 ‘너’라는 말이다. 서태지의 음악에서 ‘너’는 12개의 음(音)이고, 추억 속의 소녀이고, 어머니의 품이고, 그의 음악을 기다리는 팬이며, 그가 꿈꾸는 이상적 자아이기도 하다. 서태지 자신이 표현하고 싶었지만 표현해 본적은 없는 음악이 바로 ‘너’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주체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생성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태지의 음악은 ‘너’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자 동시에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주체성(identity)과 독창성(originality)은 절묘한 화해에 도달한다. ‘너’는 ‘나’의 근원이자 이상이며, 출발점이자 도달점이기 때문이다. 나와 너 사이에 놓여진 차이의 변주가, 아마도 서태지 음악의 기원이 아닐까.

신화의 저편으로부터 돌아온 33세의 얼굴 하얀 젊은이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음악을 들었다.

김동식 문학평론가


입력시간 : 2004-02-06 14:11


김동식 문학평론가 tympa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