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9단의 깜찍·발칙한 내숭김하늘, 프로사기꾼과 시골 며느리의 이중적 코믹연기로 웃음 유발

[시네마 타운] 그녀를 믿지 마세요
사기 9단의 깜찍·발칙한 내숭
김하늘, 프로사기꾼과 시골 며느리의 이중적 코믹연기로 웃음 유발


한국 영화 혹은 대중 문화에서 수용자 연령층이 낮아지기 시작하던 무렵(1990년대 초반쯤)부터 한국에서 여성이 스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첫번째 요소는 ‘청순함’이었다. 거기다 다른 수식어 하나를 덧붙인다면 ‘귀여움’이 될 것이다. 많은 여성 스타가 그 두 가지 특성이 빛을 발하는 외모와 이미지로 무장된 역을 통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최진실, 최지우, 명세빈, 송혜교, 손예진 등은 그런 여성 스타 중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성이 금기이었듯이 ‘섹시하다’라는 용어가 퇴폐적으로 치부됐던 시기를 지나 90년대 후반부터는 ‘섹시하다’가 서구적인 의미와 동일하게 사용되면서 단순한 노출을 떠나 누드 열풍까지 불고 있는 현재, 청순가련형의 귀여운 여성 스타가 단연 압도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최근 이효리에 이르면 앞에서 언급한 모든 요소를 포함한, 좀더 복합적인 유형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듯하다.

김하늘도 그런 변화의 흐름에서 동떨어져 있다고 보기 어렵다.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누구보다도 청순한 이미지를 구축해왔던 그녀는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를 통해 니트와 스커트에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연기에서 180도 전환, 가냘프고 예쁜 여배우도 웃기는 역을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수완이라는 캐릭터는 <엽기적인 그녀>와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서 차태현이 보여줬던 ‘귀엽고 엉뚱한 순정파’ 이미지와 가장 흡사하다.

△ 김하늘의 코믹 연기, 전성기를 맞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상당 부분 김하늘(영주)의 코믹 연기에 의존하고 있는 영화다. 교도소 가석방 심사에서 눈물을 머금으며 심사위원들을 감동시키는 청순하고 감정적인 표정에서 “웃기고 있네”식의 냉소적이고 거침없는 모습으로 시시각각 돌변하는 영주의 모습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얽히게 되는 희철과 그의 가족들 앞에서 벌어질 사기극을 예견케 한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웃음을 유발시키는 장치인 동시에 영주의 진심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드라마의 긴장감을 유발시키기도 한다.

가석방 기간 중 조용히 지내려 마음 먹은 영주는 부산행 기차에서 희철이라는 약사를 만나게 된다. 그를 치한으로 오인하면서 한바탕 몸싸움이 벌어진 후, 희철이 여자친구에 프로포즈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반지를 소매치기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잠시 고민하던 영주는 자신이 도둑 누명을 쓰지 않기 위해 특유의 작전에 돌입, 다시 반지를 되찾지만 기차는 이미 플랫폼을 떠난다. 영주는 반지를 돌려주고 기차에 두고 내린 가방도 찾기 위해 몇 가지 신상정보를 바탕으로 무작정 희철을 찾아간다. 하지만 일은 점점 꼬이고 꼬여 그를 만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의 가족은 영주가 희철의 아이까지 임신한 약혼자로 오해한다. 영주의 사기 9단의 실력은 궁지에 몰릴 때마다 빛을 발하고, 희철은 영주를 버린 파렴치한 바람둥이로 낙인이 찍힌다.

언뜻 쉽게 해결이 날 것 같은 사기극은 사기꾼 영주와 진실한 영주의 두 모습의 교차와 변화를 통해 더욱 흥미로와진다. 희철의 약혼자이자 이장님의 며느리로서 조작된 영주가 주변 인물들에게서 신뢰를 얻을 뿐만 아니라 영주 스스로가 연기하고 있는 인물에 몰입 되면서 교활한 사기꾼과 순진하고 이상적인 시골 며느리는 시시각각 한 육체를 넘나든다.

만약 <그녀를 믿지 마세요>가 정체성에 대한 코미디였다면, 이 서로 상반된 영주를 더욱 교묘하게 만들어서 무엇이 진짜인지를 모르게 만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어떤 것이 진짜인지 중요하지 않고 정체성이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영화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고전적이고 보수적이고 예상 가능한 도덕성과 사랑을 예찬한다.

△ 보수적 정서, 가부장적 공동체 예찬

희철은 개인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대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다. 젊은 나이와 준수한 외모, 그리고 약사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는 이 향토적인 남성은 가족과 고향을 여자친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사기꾼 영주는 희철이 속해있는 가부장적 공동체에서 안락과 평온을 느낀다. 영주가 희철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그의 가족과 고향에 편입이 되어 그의 생활과 삶을 체험하게 되면서 이고, 반면 희철이 영주에게 애정을 느낀 것은 영주가 그가 원하던 아내의 역할(이장님의 며느리와 여동생에게 도움을 주는 친언니같은 새언니, 그리고 남편의 성공과 시댁?명성을 위해 노력하는)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결말에 다다를수록 ‘애정빙자사기극’은 모든 주민들이 가족처럼 지내는 ‘전원일기’와 같아지고, 영주와 희철의 관계는 시작만 좀 특이했지 신분격차를 뛰어 넘는 낭만적 사랑의 공식과 유사해진다. 특히 프로사기꾼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을 자랑하던 영주는 사랑의 힘(?)을 통해 원래 내면에 가지고 있었던 따뜻하고 진실된 모습을 찾는다. 영주가 희철이 할머니에게 밥을 먹여주면서 슬퍼하는 장면과 결혼식 전 언니를 찾아간 장면은 그 점을 증명한다.

휴머니즘과 이성애적 사랑에 대한 일종의 공식 같은 이야기의 귀결보다 사기극이라는 이야기의 출발점처럼 끝까지 영주의 사기를 볼 수 있었다면 그녀를 믿지 않는 재미를 맛봤을 텐데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중반이 지나면 그녀를 믿게 만들어버리는 아쉬움을 남긴다.

시네마 단신
   

<바람난 가족>에 이어 <효자동 이발사>에 출연 중인 문소리가 5월 크랭크인할 영화 <사과>를 차기작으로 선택했다. <사과>는 한 여자와 그녀가 사랑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 20~30대 남녀의 연애와 결혼, 사랑에 대한 솔직하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문소리는 사랑과 일 모두에 솔직한 여주인공 현정 역을 맡았다. 신인 강이관 감독의 데뷔작.

<실미도>와 <태극기를 휘날리며>의 흥행선전으로 발렌타이를 목표로 개봉 예정이었던 <8명의 여인들>의 개봉이 두 주 미뤄져 2월 27일 극장에 걸릴 예정이다. 이어 <러브 미 이프 유 데어>가 개봉을 3주나 늦춰 3월 5일에 개봉한다고 밝혔다.

채윤정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4-02-18 15:56


채윤정 영화평론가 blauth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