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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의 문화읽기] 책읽기는 즐거움이어야


프로그램 제작진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졌던 것일까. ‘TV 책을 말하다’의 자문회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 조금은 심란했다. 책이 가볍게만 다룰 수 없는 까다로운 매체이다 보니,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신경 써야 할 대목이 많다. 하지만 같은 시간대의 드라마들 사이에 치여서 기대하는 만큼 시청률이 나오지 않는 실정이다. 이러다가 현재의 방송시간인 목요일 밤 10시에서 심야시간대로 옮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보인다. 소탈한 진행이 돋보였던 박명진 교수는 언론학회장에 선임되면서 스스로 물러났고, 전체적인 포맷은 대화와 토론 중심에서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갖가지 오해도 생기고 여기저기서 말도 많이 듣는 것 같다. 그다지 밝지 못한 표정들에서 책 프로그램 만들기의 어려움이 느껴진다.

책과 텔레비전은 친해지기 어려운 매체들이다. 두 매체가 상정하고 있는 수용자층의 성격만 보더라도 사정이 명확해진다. 텔레비전이 상식과 교양을 지닌 일반대중을 형성하는 전자 미디어라면, 책은 개별적인 관심과 취향을 가진 개인들을 위한 문자 미디어이다. 따라서 특화된 취향과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책이, 텔레비전의 포괄적인 대중성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두 매체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영향력은 매우 크고 생산적이다. 텔레비전과 매개될 때 책은 보다 일반적인 소통의 차원을 마련할 수 있고, 책의 성찰적인 성격은 텔레비전 매체의 일방향성을 완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유수한 독서 프로그램들은, 책과 텔레비전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스스로 깨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 될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베르나르 피보가 1975년부터 ‘아스트로프’와 ‘부이용 드 퀼튀르'를 진행하며 책을 소개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자의 심층적인 지식과 일반대중의 잠재적인 관심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하려고 했던 피보의 노력과 태도는 프랑스 문화를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독일에는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가 1988년부터 2001년까지 진행했던 ‘문학 사중주’가 있다. 독설가로도 유명한 라니츠키는 유명작가의 작품에 대해서도 혹평을 서슴지 않았는데, <양철북>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귄터 그라스와의 논쟁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미국에는 유명한 여성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책 읽는 미국을 만들겠다며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1996년부터 ‘오프라쇼’에서 지속적으로 책을 소개해왔는데, 작년에 소개한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을 젖히고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기현상을 연출하기도 했다.

진행자와 프로그램의 성격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10년 이상 또는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꾸준하게 책과 대중의 만남을 주선해 왔다는 사실이다. 모든 일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듯이, 책과 텔레비전의 만남 또한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오랜 방송 생활을 통해서 1,400만 명의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독일이나 프랑스라고 해서 프로그램의 대중성이 문제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책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을 끊임없이 형성해 나갔고, 그 결과 한 나라의 문화적 자존심을 보여줄 수 있는 독서 프로그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갈수록 책은 재미없는 매체로 여겨지고 대중들의 외면을 당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보와 이미지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해서 책의 중요함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화 사회의 빈곤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매체가 책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책에 접근할 수 있는 소통의 스펙트럼에 있을 것이다. 책과 관련된 사회적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책의 일반적인 내용과 함께 책 읽는 즐거움이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책이 갖는 의미는 몇 줄로 요약해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서과정의 즐거움 속에서 각자가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좋아하는 구절과 생각하는 주제가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책은 다양한 반응과 태도를 생성하는 매체이다. 책에 잠재된 문화적 다양성이 신문이나 텔레비전과 같은 다양한 미디어들과 매개될 때 광범한 소통의 고리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문화적 우월감이 아니라 문화적 자신감을 드러낸다. 한국은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이기도 하다. 책읽기의 즐거움이 배어나는 낮은 목소리들을 여러 곳에서 듣고 싶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pan@empal.com


입력시간 : 2004-02-1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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