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저항 포크가수 김의철 데뷔음반, 30년만에 재발매

포크 명반, 금지의 굴레를 벗다
70년대 저항 포크가수 김의철 데뷔음반, 30년만에 재발매

70년대의 저항포크가수 김의철의 이름을 기억하는 대중이 몇이나 있을까? 세계기타협회 회장이었던 스페인의 나바스코스와 전설적인 세계적 클래식기타리스트 세고비아의 수제자 볼로틴이 감탄해 마지않았던 기타리스트가 김의철이다. 그가 부른 읊조리듯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곡 들 중 그나마 대중들의 기억 저편에 살아있는 노래는 '저 하늘에 구름 따라(원제 불행아!'와 '마지막 교정' 정도. 하지만 놀랍게도 금지되었던 그의 오리지널 데뷔LP음반은 중고시장에서 1백만원을 주고도 구경조차 하기 힘든 한국 포크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30년 동안 지하에 숨겨져 있던 문제의 그 음반이 CD와 함께 LP로도 복각되어 2월 말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데뷔음반의 좌절 이후 김의철은 포크의 순수한 정신을 지키기 위해 방송이나 음반을 통한 상업적인 활동을 접고 독일과 미국으로 클래식 기타유학을 떠나 버렸던 비운의 대중음악 아티스트이다. 그런 그가 포크의 전당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명동 YWCA 청개구리 포크공연의 공연 기획자 겸 포크 전문 음반제작사 '솟대'의 대표로 되돌아왔다. "지난 해 7월 부활 청개구리 공연이후 방의경, 이성원, 김두수, 양병집, 윤연선, 이용복씨등 20여명의 포크가수들이 청개구리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 달은 서유석 선배의 무대입니다. 음반도 4장정도 발매했습니다" 18년 만에 귀국한 1996년 이후 그는 양희은의 음악감독으로 줄 곧 활동해왔다. 양희은은 '김의철의 기타연주는 세계적'이라고 거침없이 추켜세운다.

- 예술혼에 불타던 젊은 날

김의철은 5살 때 지붕에 올라가 놀다 '동네에 광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뛰어내리다 크게 다쳐 여섯 차례나 다리절단 위기를 넘기는 대수술을 받아 지금도 다리가 불편한 상태. 그의 형제자매는 클래식 예술가로 유명하다. 큰 형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뉴저지 심포니, 뉴욕필하모니 악장을 지낸 금호4중주의 창시자인 한양대음대 관현악과장 김의명 교수이다. 그는 보성중학 때 누나가 구해온 합판으로 만든 천 원짜리 기타소리에 매료되면서 기타를 잡았다. 누나로부터 기본코드만 익히고 홀로 기타배우기에 몰입했다. 1969년 중3때 첫 창작곡 '뭉개구름'등 10여 곡을 작곡했을 만큼 음악성은 타고났었다. 청소년기는 혹독한 시련의 연속. 형제들은 모두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부모님도 사업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나 홀로 한국에 남겨졌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싸워야했다. 공부보다는 기타만을 끼고 살다보니 70년대 사회분위기에서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심신의 견디기 힘든 고통은 가출로 이어졌지만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마다 오히려 예술혼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젊은 날의 그의 노래들은 솔직한 그의 음악일기였다.

보성고 1학년 때 박인희가 DJ를 했던 '세븐틴'의 첫 방송에서 창작곡인 '저 하늘에 구름 따라'를 불러 음악관계자들의 놀라게 했다. 그는 대학진학보다는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 개발붐으로 들썩거렸던 강남 반포에 칸 기타스튜디오를 오픈했다. 1973년 3월 어느 날, 성음 나형구사장이 "국내 최연소작곡자의 음반 제작'을 제의해 왔다. 첫 음반을 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유신정권의 색안경에 비친 김의철의 노래들은 너무도 어두웠다. 검열통과부터 삐그덕 소리가 났다. 이에 성음제작소 측은 제목과 가사를 본인의 허락도 없이 수정해 검열을 통과시켰다. 그런 사연 탓에 그의 유일한 독집LP <김의철 노래모음>은 1년 뒤에야 세상 빛을 보았다. 그러나 그 음반은 천재적 음악성을 지닌 김의철을 오히려 대중들과 격리시키는 사망 신고일 줄을 누가 알았을까. 또한 수록곡인 박찬응의 곡들이 '창법미숙'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방송금지 처분까지 내려지자 스스로 판매금지처분까지 내려버렸다. 바로 이 음반이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골수 팬들에 의해 30년 만에 CD와 LP로 재 발매되어 포크 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총 10곡의 수록곡 중 타이틀 곡인 '마지막 교정'은 졸업식 날 즉흥적으로 제목도 없이 만들어 불렀던 노래. 문제의 2면 첫 곡 '저 하늘에 구름 따라'는 원제목이'불행아!'였다. 세상과 김의철을 격리시킨 곡이건만 양희은, 이광조, 김광석 등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리어져 대중이 가장 친숙하게 기억하는 노래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주목할 노래는 당시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 한국학 교수로 재직중인 박찬응 노래 2곡.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목소리로 들려준 '섬아이'와 '평화로운 강물'. 밑바닥 인생의 애환이 서린 듯 가슴을 후벼파는 거칠고 냄??그의 노래는 '창법미숙'이란 미명아래 금지명찰을 달았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70년대 유신군사정권의 횡포인가! 이후 80년대 민주화항쟁 때 폭넓게 불리어 졌던 '군중의 함성','이별가'같은 저항 곡들의 발표로 그는 질식할 것 같은 감시에 시달렸다.

- 사회에 헌사한 따뜻한 사랑의 노래

김의철의 음악은 처절한 자기극복의 울림이자 가족, 친구, 사회에 바치는 따뜻한 사랑의 연가이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서도 언제나 그를 완강하게 지탱시켜준 것은 음악과 종교였다. 73년부터 명동 카톨릭여학생기숙사내의 '해바라기'의 리더를 맡았다. 초기 해바라기는 노래로 의식화운동을 했던 70년대의 또 다른 청년저항문화의 산실이었다. 늘 맑은 노래에 심취된 젊은 관객들로 북적거리자 군사정부는 사퇴압력을 가하며 정보원들을 상주시켰다. 그는 정보원들에게 목탁으로 머리를 얻어맞으며 협박을 받았다. 성당과 가족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한 김의철은 75년 이정선에게 진행을 넘기며 물러났다. 80년 4월 결혼과 함께 서양음악의 근본을 알기 위해 독일과 미국으로 떠났다. 세계적 기타리스트들에게 음악을 사사 받고 연주력을 인정받아 뉴욕에서 기타교수로 재직했다.

얼마 전 독일의 한 일간지에 그가 소개되었다. '나치가 600명의 저능아를 살해한 것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열리는 추모회에 전 세계 장례 곡들 중 한국의 김의철 곡이 선곡되어 91년부터 10년 간 빠짐없이 불리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80년대 민주화항쟁 당시. 작곡자의 이름과 얼굴이 베일에 가려진 채 '군중의 함성'과 '이 땅의 축복 위하여' 두 곡이 운동권 학생을 중심으로 널리 불리어졌다. 바로 김의철이 작곡한 노래들이었다.

그는 92년에 미국 LA에서 제작한 2집 <그 산하>와 93년엔 3집 <연가집>을 발표했지만 홍보조차 못해보고 사장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 음반들도 금년 상반기에 재발매될 계획이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영구 귀국한 후 양희은의 음악감독으로만 활동하던 그는 작년 7월 뜻 있는 포크 팬, 포크가수들과 함께 청개구리 포크 공연을 부활시켜 꺼져가던 포크음악의 불씨를 되살리고 있다. 상업적인 노래만이 양산되고 있는 우리가요계에 김의철 같은 대중음악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금년 1월 평화방송TV는 김의철 특집방송을 5일간에 걸쳐 방영한데 이어 2월에는 중앙일보에 '공연기획자로 뛰는 왕년의 저항가수 김의철'이라는 제하의 전면기사를 게재되었다. 30년 만에 발매되는 데뷔음반을 포함지하에 숨겨져 있던 그의 음반들이 줄지어 발매를 될 예정이라는 소식이다. 뒤늦게라도 대중과 철저하게 격리되었던 그의 음악이 재평가를 받는 분위기가 조성됨은 반갑기만 하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2-26 13:24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