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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타운] 8명의 여인들
여덟빛깔 꽃들의 화려한 위선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매혹적인 여성들의 갈등과 동지애


<8명의 여인들>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 8명의 향연이라는 점은 이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펼쳐진다. 각 배우의 이름이 화면에 올라올 때 화려하게 등장하는 각각의 꽃은 그 모양과 색채에서 이들(배우 자체 혹은 캐릭터)을 상징한다. 우아하고 매혹적이거나, 청순하고 귀엽거나, 도발적이거나, 주문에 걸린 듯 황홀하거나, 혹은 측은해보이는 등. 다양한 연령대 만큼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이 여성들은 1950년대 어느 크리스마스, 한적한 교외에 있는 저택에 모이게 된다.


- 8명의 여인, 8가지의 꽃, 8가지의 색깔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수종(비르지니 르드와양)은 방학을 맞아 성탄절 아침 집에 도착한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엄마 게비(까뜨린느 드뇌브)와 휠체어에 앉아있는 외할머니(다니엘 다리유), 가정부 샤넬(휘르민 리샤르), 여동생 까뜨린느(뤼드빈 사니에르), 그리고 이모 오귀스틴(이자벨 위뻬르)이 그녀를 반갑게 맞는다. 거실과 부엌에 있던 그들은 갑자기 미모의 하녀 루이즈(엠마뉴엘 베아르)의 비명소리를 듣는다. 아빠 마르셀이 등에 칼이 꽂힌 채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 여인들은 범인이 내부에 있다고 판단, 서로를 의심한다. 곧 고모 피에레뜨(화니 아르당)가 집을 방문하고 그녀도 내부의 인물임이 밝혀진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저택. 전화도 불통이고 차마저 고장이 나고, 게다가 눈까지 엄청나게 쌓인 성탄절에 서로가 범인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극한 상황에서 8명의 인물들은 화합과 인내, 협동보다는 위선과 비난을 일삼는다. 꽉 낀 하녀복에 타이트한 검정 부츠를 신은 도도한 루이즈는 아빠와 5년간 밀애를 하다 집에 들어오게 되었고, 게비는 남편의 동업자와 불륜 관계이고, 오귀스틴은 형부에게 애증의 감정이 있었고, 수종은 임신중이다. 다른 인물들도 모두 비밀이 있고, 서로 추궁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과거의 비밀도 드러난다. 충격적인 고백과 폭로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하긴 어려워진다.

- 스릴러, 뮤지컬, 코미디, 멜로드라마의 혼성모방



누가 범인인가를 밝혀내는 스릴러가 기본 축이지만 여기에 뮤지컬이 더해지고, 코믹한 캐릭터(특히 오귀스틴)와 우스꽝스러운 상황들이 소극(笑劇)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각각의 인물들이 빚어내는 관계는 지극히 멜로드라마적이고 결말은 비극적이다. 의상과 무대장치, 그리고 철저하게 통제 관리된 퍼포먼스를 통해 조형적인 외면의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는 이들의 숨겨진 감정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침전한다. “아빠는 시대에 뒤떨어졌어”(1963년 셰일라가 불러서 히트했던)라는 가볍고 유쾌한 까뜨린느의 노래로 시작, “세상에 행복한 사랑은 없다”(루이 아라공의 시에 조르쥬 브라센이 곡을 붙인)라는 외할머니의 탄식으로 마무리된다.

8명의 여성들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이 영화가 여성 관객을 타깃으로 한 여성영화라거나 혹은 페미니즘 영화라고 예상하는 것은 오산이다. 오히려 너무나 매력적인 여러 명의 여성들이 끊임없이 화면에 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은 남성 관객들에게 더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모든 캐릭터가 갖고 있는 갖가지 문제점들, 특히 마르셀이라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태도와 생각은 이 영화의 감독(프랑스와 오종)이 혹시 여성을 비하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개에서 드러나는 부정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8명의 여인들은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특히 이들이 차례대로 한 곡씩 부르는 노래는 개별적인 인물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다. 이런 영화의 특성은 까뜨린드 드뇌브가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과 가졌던 인터뷰를 상기시킨다. “나는 오종 감독이 여성을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여배우를 좋아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프랑스와 오종 감독은 클레어 부스의 희곡을 각색한 조지 쿠커의 1939년작 <여인들 The Women>을 리메이크하고 싶어했지만 원작의 리메이크 소유권을 이미 줄리아 로버츠와 맥 라이언이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신 1960년대에 쓰여진 로버트 토머스의 동명희곡을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그는 “아가사 크리스티식 음모를 고전적 범죄 스릴러에 결합시킨 코미디”를 염두에 두고 여성 촬영감독 쟌느 라쁘와리와 의상디자이너 파스칼린 샤반느와 작업을 했다. 그 결과로 더글라?서크의 멜로드라마, 빈센트 미넬리의 뮤지컬, 쟈크 드미와 히치콕의 스릴러의 영감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혼성모방(pastiche)이 탄생한 것이다.

- 배우와 의상의 스펙타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지만 화려한 색채의 옷감, 실내 장식, 인위적인 양식미를 강조하는 조명, 배우들의 연기, 춤, 노래는 특수효과 없이도 ‘스펙타클’의 재미를 제공한다.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한 뜸의 어긋남이 없이 화려하게 수를 놓는데, 특히 이자벨 위뻬르는 코믹함과 멜로적인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오귀스틴이라는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기숙사 사감 같은 외모와 삐딱하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마마걸이지만 정열적인 사랑에 대한 욕구와 두려움을 노래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찰스 비도 감독의 1946년도 영화 <길다>의 여주인공 리타 헤이워스로 탈바꿈한다. 굵은 웨이브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뒤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반짝이는 공단 드레스를 입고 전혀 어색하지 않게 계단을 내려온다.

의상 디자이너 샤반느가 한 인터뷰에서 “의상이 여성들간의 경쟁에서 하나의 무기”로 작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의도였다고 밝혔듯이, 게비의 녹색 드레스, 피에레뜨의 검정색과 빨간색이 대조를 이루는 의상은 이들이 감정적으로 대립할 때 확연히 경쟁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마치 녹색과 빨간색이 어울려 크리스마스의 색이 되는 것처럼 이들의 적대적 감정은 서로 모르고 있던 비밀들이 밝혀지면서 묘한 동지애와 동성애로 돌변한다.

까드린느의 노래 가사처럼 빠빠빠빠하고 흥겹게 출발했던 영화의 톤은 갈수록 어두워져 샤넬은 외로움을, 외할머니는 애처로움을 노래한다. 그러나 결말의 우울함은 잠시이고, 아름답고 생동감 있고 눈부신 여배우들의 이미지들은 기억을 떠나지 않는다. <8명의 여인들>은 여성성을 예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배우들을 극찬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시네마 단신
  
이병헌 <쓰리, 몬스터> 출연
영화배우 이병헌이 아시아 3국 공동프로젝트 <쓰리>의 2004년 버전인 <쓰리, 몬스터>에 출연한다. <쓰리>는 한 장르를 세 나라 감독이 각기 다른 개성으로 풀어가는 옴니버스 영화로 2002년 개봉한 1편에는 한국의 김지운, 홍콩의 천커신(陳可辛), 태국의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이 참여했다. 2편 격인 <쓰리, 몬스터>에서는 한국의 박찬욱, 홍콩의 류웨이장(劉偉强), 일본의 미이케 다카시 세 감독이 '몬스터'로 상징되는 인간 내면의 악마성을 소재로 각각 30분 내외 분량의 단편을 선보인다. 제작사에 따르면 이병헌은 감독에 대한 신뢰 때문에 개런티 없이 출연하기로 했다. <쓰리, 몬스터>는 8월께 개봉할 예정이며 박 감독의 단편은 3월 중 촬영될 예정이다.







채윤정 영화평론가 blauthin@empal.com


입력시간 : 2004-02-26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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