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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빈 서판
본성과 양육, 그 극단적 상호작용에 대해
스티븐 핑커 지음/김한영 옮김/사이언스북스 펴냄


책 제목, 빈 서판(書板)은 ‘깨끗이 닦아낸 서판’이라는 뜻의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의역한 말이다.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가 자신의 경험론을 옹호하는 데 이 말을 썼다고 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인종, 성, 개인들 간의 어떠한 차이도 선천적 체질 차이가 아니라 경험상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이는 세습 왕권과 귀족 신분의 정당성을 뒤흔들며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빈 서판 이론은 현대 생물학의 거대한 도전에 직면한다. 이른바 유전자결정론이 그것이다. 마음과 뇌, 유전자, 진화를 연구하는 현대과학은 빈 서판의 오류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다. 극단론자들은 동성애 유전자, 범죄 유전자 같은 개념들까지 내세우며 인간을 결정론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책의 지은이도 빈 서판 이론에 비판적이다. 지은이는 빈 서판 이론이 보편적인 인간성과 개인적 취향을 부정하고 사회 문제들에 대한 분석을 사탕발림의 슬로건으로 대체한다고 비판한다. 빈 서판 이론이 득보다 실이 많았다는 것.

“빈 서판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 빈 서판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는 공백이 생겼다. 그것은 교육, 양육, 예술을 사회개조를 위한 형식으로 악용하고 있다. 빈 서판은 우리가 진실이기를 희망하고 기원해야 할 어떤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보편적 인간성, 우리의 선천적 관심사, 우리의 개인적 선호를 부인하는 비인간적 이론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잠재력을 찬양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정반대이다. 우리의 잠재력은 텅 빈 서판의 수동적인 공백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대단히 복잡한 정신적 기능들의 조합적 상호작용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지은이는 극단적인 ‘본성’의 입장(인간의 본성은 타고난다는 주장)에 서서 극단적인 ‘양육’의 입장(인간 본성은 후천적인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공격하지 않는다. 진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 놓여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언어처럼 극단적인 환경적 설명이 옳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유전적인 신경장애 같은 극단적인 유전적 설명이 어울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유전과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보는 것이 옳은 설명일 것이다.

지은이는 본성과 양육이라는 두 관점을 균형있게 다룰 수 있는 지혜를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다.

입력시간 : 2004-03-03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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