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감성이 사랑으로 바뀔 때치과의사의 가슴 속에서 새록새록 싹트는 삭랑의 감정유쾌한 로맨틱 코미디, 따뜻하고 느린 영화적 상큼함도

[시네마 타운] …홍반장
순수의 감성이 사랑으로 바뀔 때
치과의사의 가슴 속에서 새록새록 싹트는 삭랑의 감정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 따뜻하고 느린 영화적 상큼함도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긴 제목으로 기록될 <…홍반장>은 홍반장(김주혁)이 아니라 윤혜진(엄정화)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독특한 영화다. ‘멜로’라는 용어로 축약되는 거의 대다수의 한국 영화에서 내러티브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남성이었는데(<엽기적인 그녀>를 떠올려보라) 이 영화에서 홍반장은 혜진과 그녀의 간호사 친구 미선(김가연)이 바라보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홍반장>은 단순히 성별만 반대로 설정해놓고 보수적인 남녀 관계를 어리석게 반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홍반장>은 여성 관객이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연애 이야기다.

- 홍반장, 직업인의 카멜레온 혹은 반장 가제트

, 결말에는 바로 이런 타입이 여성들에게 ‘이상형’ 이라는 믿음을 의심치 않게 만든다. 그렇다고 혜진이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권의식이 있고, 정의롭고, 당차지만 동시에 순진하고 귀여운 치과의사다.

치과의사 혜진은 부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사표를 내밀다가 그만 직장을 잃는다. 우연히 알게 된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에 병원을 열기로 한 혜진은 병원 자리를 물색하다 부동산 중개인 자격의 홍반장을 만난다. 하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 직원, 택배 배달부, 자장면 배달원, 라이브 카페 가수 등 마치 직업의 카멜레온 혹은 반장 가제트 같은 홍반장은 혜진과 만날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무엇보다 혜진이 홍반장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 사건은 홍반장과 깡패 집단과의 대결이다. 환자로 병원에 찾아와 혜진을 성희롱한 깡패의 두목은 홍반장에게 혜진이 애인이냐고 묻자 홍반장은 애인이라며 그들을 혼낼 명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믿기지 않는 싸움 실력으로 그들을 쫓아낸다. 하지만 홍반장의 도움이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혜진은 여성에게 행해지는 남성 폭력에 대항하다가 두 번이나 경찰서에 끌려가고, 홍반장은 그 때마다 구세주처럼 나타나 진실을 밝혀준다.

홍반장은 언덕 위에 올려 놓은 배를 수리하거나, 페인트 칠을 하고, 버린 책들을 수집한다. 그의 집은 LP음반과 타자기 등 골동품 가치가 있는 것들로 둘러 쌓여있다. 마치 혜진이 처음 마을을 둘러보고 의아해 했듯이 아름답고 화목하고 협동적인 공동체 마을과 홍반장, 그리고 그의 공간은 모두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혜진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와인을 들고 홍반장을 찾아오고, 둥근 나무 탁자에 앉아 클래식 LP를 들으며 혜진은 와인을, 홍반장은 소주를 마신다. 대도시 출신의 세련된 전문직 여성과 일당 5만원의 허접한 일을 하는 허름한 차림의 소도시 핸디맨(handy-man)의 합석은 현대 도시의 전문성과 과거 공동체 정신의 융합을 꿈꾼다.

그런 과정에서 홍반장은 그녀가 예쁘지 않다고 심각하게 얘기하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말하면서도 그녀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홍반장에 대한 감정이 깊어지는 혜진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결말이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는 것도 홍반장이 혜진에게 찾아오기 때문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그녀가 차를 몰고 가기 때문이다.

- 엉뚱하고 귀엽지만 매력적이고 능동적인 치과의사 윤혜진

성적 욕망에 대해 적극적이었던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와 <싱글즈>의 동미와는 달리 혜진은 귀여운 표정에 분홍색 추리닝을 입은 순수한 여성으로 나타난다. 혜진 대신 섹시함을 추구하고 성적 표현에 좀더 노골적인 여성은 미선이다. 痴ㅘ??김가영은 평소 이들의 지배적인 이미지인 섹시함과 귀여움을 뒤바꿔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전 이들이 갖고 있던 이미지들이 역할 전환을 했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혜진과 미선은 단선적이기보다 보다 복잡미묘한 특성—섹시함, 귀여움, 코믹함의 황금비율--을 지니게 된다.

또한 재벌 아버지로부터 대학시절 독립해 지금은 오히려 아버지에게 용돈을 보내는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이 치과의사는 세련된 상류층 파티의 스타일리쉬한 남성보다 하얀 페인트를 곧잘 얼굴에 묻히고 하층 계급의 직업 의상을 바꿔 입는 홍반장을 택한다. 한국 여성을 대표해 치한을 공격하려다 유치장에 갇혔을 때는 힐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바닥에 명상자세로 앉아 경찰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더니, 사천만 국민을 대표해 버릇없는 운전자에게 복수한 죄로 다시 경찰서에 왔을 때는 창살을 붙잡고 엉엉 우는 종잡을 수 없는 엉뚱한 매력의 소유자다.

- 명랑하고 즐거운 영화

“치과”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혜진은 홍두식이라는 이름 대신 홍반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둘은 서로를 혜진과 두식으로 부른다. 김춘수의 시 <꽃>처럼.

<홍반장>은 시끄럽고 템포가 빠른 편집과 사운드의 장난을 통해 웃겨보려고 하지 않는다. 혜진이 동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나올 때 나오는 배경음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음악도 극 내에서 혜진이나 두식이 부르는 노래들이다. 촬영도 홍반장과 깡패들의 결투장면을 제외하고 주로 혜진과 두식이 마주 보거나 나란히 있는 장면을 조용하고 대등하게 보여준다. 카메라의 앵글이나 구도의 변화 없이 교차되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최근의 속도 빠른 영화에 비해 꽤 길게 지속되면서 배우들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대사의 재치와 얼굴 표정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 영화로 데뷔하는 강석범 감독은 “사회전복이라는 강렬한 통쾌함”보다 “소시민적인 명랑함으로 상쾌함”을 주려고 했다고 밝혔는데, <홍반장>은 상쾌함 외에도 자연 친화적인 따뜻함과 즐거운 유머가 있다.

시네마 단신
   
- 한국영상자료원 50년대 멜로영화전

한국영상자료원은 22일부터 6일간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매혹과 혼돈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50년대 멜로 영화전을 개최한다. 멜로영화는 50년대 후반 전체 영화의 60%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인기장르 였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청춘 쌍곡선(김한일), 순애보(한형모), 지옥화(신상옥)를 비롯 총13편이 선보인다. 오후 2시 30분부터 하루 세 차례 상영되며 관람료는 2,000원. (www.koreafilm.or.kr)

- <미소> 크리테이유영화제 초청

박경희 감독 <미소>가 12일부터 21일까지 프랑스에서 열릴 제26회 크리테이유 국제여성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추상미가 주연을 맡고 <꽃섬>의 송일곤 감독도 출연해 화제를 모은 <미소>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여류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지난해 4월 서울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처음 소개된 데 이어 스위스 로카르노와 캐나다 밴쿠버, 부산 등의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채윤정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4-03-11 17:01


채윤정 영화평론가 blauth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