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용 배우'로 전락하며 설 자리 잃어가는 중견 연기자들와 서 농익은 연기로 진가 발휘

중견이 몸부림 치면 신세대 스타보다 아름답다
'밥상용 배우'로 전락하며 설 자리 잃어가는 중견 연기자들
<고독이 몸부림 칠 때>와 <꽃보다 아름다워>서 농익은 연기로 진가 발휘


“신인 연기자들이 상업적인 성공만을 추구해 중견 연기자들이 많이 출연하는 드라마에 끼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최근 배종옥이 신인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스타나 신인들이 중견 연기자들과 호흡을 맞추는 드라마에 출연을 기피하는 세태를 두고 한 지적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오죽했으면 ‘밥상용 배우’ 라는 용어가 보편화 됐을까? 트렌디 드라마의 범람과 10~20대를 타깃으로 하는 영화가 주류를 이루면서 연기 경력 20~40년에 달하는 중견 배우들은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의 뒷자리로 밀려났다. 가족들이 식사하는 때인 밥상용 장면에만 등장하는 중견 배우들을 일컬어 우리는 밥상용 배우라고 칭한다. 근래 들어서는 미니 시리즈는 물론이고 중견들의 주연 몫이라고 여겨졌던 전통적 일일극, 주말극 등 홈드라마에서 조차도 중견 연기자들은 밥상용 배우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다. 조폭영화, 코미디물, 인터넷 소설을 영상으로 한 10대 대상의 영화 등 가족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영화들이 봇물을 이루면서 중견 배우들은 밥상 장면에서도 나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화의 제국이라는 할리우드에서 50~70대 배우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 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의 영화 팬들을 극장으로 향하게 하며 세계적인 스타로 군림하는 것과 너무나 대조적인 추세다.

- “니들이 연기의 맛을 알아”

밥상용 배우 기능을 걷어치우며 중ㆍ장년 배우들이 모처럼 주연으로 전면에 나서 오랜 경륜이 묻어나는 농익은 연기력을 선보이는 영화와 드라마가 있어 눈길을 끈다. 바로 영화 ‘고독이 몸부림 칠 때’와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이다. 한국 영화가 젊은 스타와 신세대 연기자를 내세워 10~20대의 주머니를 노리는 방향으로 무한질주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연 배우 평균 나이가 57세라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한(?) 영화로 시선을 끄는 것이 바로 ‘고독이 몸부림 칠 때’이다. 주현(63), 김무생(61), 양택조(65), 송재호(65), 선우용녀(59), 박영규(51) 등이 명실공히 공동 주연한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장년의 고독을 유머와 페이소스를 통해 자연스러운 웃음과 함께 드러낸다. 이 영화는 이들 인물 개개인에게 균등하게 카메라의 시선을 줘 실제적으로 다수 공동 주연의 의미를 살려냈다.

한국 영화는 1950~1960년대 전성기를 지나 1970년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불황기를 타개하기 위해 호스티스 영화와 하이틴 영화 제작에 매달렸고, 1980년대 에는 군사독재의 영향으로 섹스물과 코미디물이 범람했다. 이후 대중문화 시장이 급팽창하고 10~20대가 대중문화의 최대 소비자 층으로 떠오르면서 이들을 잡기 위한 획일적인 영화들이 쏟아지면서 중ㆍ장년을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는 종적을 감췄다. 젊은이 위주의 장르와 신세대 스타만을 기용하는 영화가 범람 하면서 오랜 연기자 생활과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녹여낼 수 있는 중ㆍ장년 연기자들은 설자리를 잃고 엄청난 연기자 자산은 사장돼갔다.

이번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이들 중ㆍ장년 연기자들의 경험과 연기가 빛을 발한다. 그래서 또 다른 영화의 재미가 있고 젊은 연기자들에게는 연기의 사표 역할을 할 수 있는 의미까지 더한다. 밥상용 연기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또 다른 맛이 있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고독이 뭔지, 인생의 쓴맛이 뭔지 알겠나. 우리 나이의 배우들이 아니면 안되는 영화도 있지.” 양택조의 탄식처럼 정말 신세대 연기자와 젊은 스타가 표출해 낼 수 없는 영화가 있는 것이다.

- 시청률 경쟁으로 반짝스타 기용

브라운관의 풍경이 크게 달라진 것은 1992년 전후다. SBS의 가세로 더욱 치열해진 방송 3사의 시청률 전쟁과 젊은 시청자를 잡기 위한 시트콤( SBS ‘오박사네 사람들’)과 트렌디 드라마(MBC ‘질투’)가 1992년부터 선보인 뒤 이 장르들이 방송의 대표적인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으면서 중견 연기자들은 브라운관의 주연 자리에서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또한 방송사들이 시청률을 의식해 불륜, 한 남자를 둔 이복자매의 사랑, 출생의 비밀, 젊은 주인공의 극적인 죽음, 신데렐라식 성공, 캔디류의 캐릭터 등 미니 시리즈적 소재와 캐릭터들을 중견들이 주연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는 일일극이나 주말극에 대량 유입시켜 중견의 입지가 사라졌다.

젊은 감각과 유행, 그리고 신세대 위주의 자극적 소재, 빠른 템포, 현란한 영상, 화려한 볼거리를 특징으로 하는 트렌디 드라마는 10~20대 연기자 전성시대를 열었다. 또한 성인 시트콤이 주류를 이루는 미국과 달리 초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는 젊은 층을 겨냥한 청춘 시트콤이 우리 방송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연예계에 갓 데뷔한 신인들이 연예계 유통 통로로 시트콤의 주연을 차지하면서 중ㆍ장년층 연기자들은 이 장르에서 모습을 감췄다.

중견들이 유일하게 설 수 있는 곳이 젊은 스타들이 출연을 기피하는 전통 사극이나 고도의 연기력을 요하는 대하 드라마뿐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스타들이 사극과 대하 드라마의 주인공에 캐스팅되면서 여기에서조차 중ㆍ장년층의 농익은 연기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크게 감소했다.

- 경륜과 깊이있는 연기로 시청자 주목

이러한 상황에서 올 초 시작해 얄팍한 선정성이나 자극적 소재로 눈길을 끌기보다는 일상성에 천착해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KBS 수목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 는 연기력이 출중한 중ㆍ장년층 연기자들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의미있는 드라마다. 작가 노희경이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 밝힌 “중ㆍ장년층 연기자를 결코 밥상용 배우로 전락시키는 구색맞추기식은 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다짐이 드라마 곳곳에서 배어나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극의 전체 흐름을 이끌고 있는 고두심(53)을 비롯한 주현, 김영옥, 맹상훈, 박성미, 배종옥 등의 캐릭터 소화가 빛을 발해 신세대 스타를 주연으로 내세운 MBC ‘사랑한다 말해 줘’ (김래원, 윤소이, 염정아 출연)와 SBS ‘햇빛 쏟아지다’(송혜교, 류승범, 조현재 출연) 등 같은 시간대 방송되는 타 방송사 드라마를 시청률 면에서 앞서가고 있다.

모처럼 중ㆍ장년 연기자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영화 ‘고독이 몸부림 칠 때’와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가 중견 연기자들이 주연으로 나서는 드라마나 영화 등 대중문화 작품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으면 한다. 이것은 바로 대중문화 콘텐츠의 양적, 질적 지평을 확대하는 일이다. 또한 “수십년 연기의 길에 정진하며 대사 하나, 표정 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중견 연기자들은 얼굴 사진 한 장으로 뜨는 얼짱 앞에 무기력하다”는 중견 연기자 주현의 한탄 섞인 비판이 나오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4-03-31 20:32


배국남 대중문화평론가 knbae2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