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토론의 기능과 가치


텔레비전에서 두 가지의 소식을 접했다. 하나는 몇몇 상품에 대한 특소세를 경감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소비자의 지갑은 좀처럼 열릴 줄 모른다는 뉴스였다. 장기 불황 때문에 극도로 위축된 소비 심리에 대한 보도였지만, 마음의 여유와 평안을 잃어버린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심리 상태로 더 크게 다가 왔다. 다른 하나는 3월 27일을 끝으로 광화문의 촛불 시위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였다. 탄핵 정국과 관련된 각자의 정치적 입장은 다르겠지만, 불확실성을 밝혀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촛불의 상징성만큼은 지속적으로 의미를 가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또는 공동체의 일반적인 관심사와 관련해서 의견을 교환하는 토론 문화는 근대의 산물이다. 조선시대에도 “언로(言路)의 열리고 막힘에 왕조의 흥망이 달려 있다”(율곡 이이)며 공론정치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공론 정치의 핵심은 국왕과 신료(臣僚) 사이의 언로를 보장하는 데 있었고,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 의사 소통의 수평적 확대를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조 때 신문을 만들려던 한 서생은 국가의 비밀을 외국에 알려주려는 것이라 하여 금고 및 압수 처분을 당했고, 이달우(李達宇)라는 사람은 균전법(均田法)을 주장하는 비판적인 한글 가사를 유포시켰다는 죄로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일반 백성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공영역(public sphere)의 발생은, 전(前)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역사적인 전환점인 것이다.

토론과 연설과 같은 의사 표현 방식은 공공 영역이 출현하면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1989년 5월 11일자 매일신문의 논설을 보면, “신문지라 연설이라 하는 것이 본래 우리나라에 전부터 있던 것이 아닌 고로, 처음 보고 처음 듣는 이들이 혹 비웃기도 하며 흉도 보”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론과 연설이 정착하는 과정에는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큰 공헌을 했다. 1896년 1월 귀국한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매주 토요일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이 강연이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그는 ‘만국회의통상규칙’을 번역하여 집회와 결사에서 활용하게 했으며, 최초의 토론단체이자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를 실질적으로 지도했다.

기록에 의하면, ‘연설’이라는 용어는 윤치호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박장대소(拍掌大笑)할 때의 박수가 아닌 공적인 의사 표현으로서의 박수는 개화기에 처음으로 교육되었다. 또한 1896년 여름부터는 가두(街頭)연설이 협성회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가두연설 역시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가두연설을 잔치로 오인하기도 했고, 청중이 모이지 않으면 협성회원이 편싸움을 하는 시늉을 해서 청중을 모았다. 협성회 회원 유영석이 청인(淸人)이 경영하는 목공소에서 접어 들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가지고 종로 거리로 나서 많은 청중들을 모아 놓고 정치적 연설을 한 일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토론과 연설은 1900년 이전에는 학교 교과목이기도 했다. 1898년 11월에 설립된 흥화학교의 경우에는 ‘토론’이, 비슷한 시기에 개교된 광흥학교의 경우에는 ‘연설’이 교과목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1890년대 후반은 연설과 토론의 시대였다. 백정 출신 박성춘이 관민공동회의 개회 연설을 했고, 어린 아이가 연설의 주체가 되어 어른들을 감동시켰으며, 극장 앞에 늘어 서 있는 사람들에게 각성할 것을 눈물로써 호소하는 청년이 나타났고, 14세 여학생이 졸업식장에서 선생님과 학우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 또한 협성회, 광무협회, 찬양회(부녀자 단체), 취영회 등의 모임이 자생적으로 생겨나서, 세인들의 큰 관심 속에서 연설회와 토론회를 개최했다.

독립신문은 토론이 지니고 있는 사회 정화(淨化) 기능과 통합 기능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토론을 통해서 편가르기가 없어지고 사람 사귀는 일은 더욱 도타워져서, 그 결과 믿음의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토론과 연설의 기능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는 민주적 가치에 대한 열망을 대변하는 것이기에, 과거의 촌스러운 풍경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아마도 공평한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토론은 그 자체로 민주적 가치를 학습하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한 세기 전의 역사적 풍경을 되돌아 보며, 토론의 민주적이고 대화적 성격을 잠시 되짚어 본다.

입력시간 : 2004-04-0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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