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다운 남자에 대한 강박관념이 빚어낸 조폭의 비극적 가족사

[문화비평] 강한 남성상과 폭력충동의 끝은?
남자다운 남자에 대한 강박관념이 빚어낸 조폭의 비극적 가족사

<남자충동>은 ‘남자다운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주인공 이장정과 그를 둘러 싼 연극이다. 1997년 초연한 안석환과 최강일 등 배우 대부분이 이번7년 만의 공연에 다시 참여해 90년대 초반 전남 목포를 배경으로 하여 조직 폭력배 이장정과 그의 가족사를 다룬다.

영화 <대부>의 주연배우 알 파치노를 숭배하는 장정이 가족을 지키고자 폭력을 휘두르며 좌충우돌하지만 결국 그의 꿈인 화목한 가족의 삶은 와해되고 자신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그 가족이 노름에 빠진 아버지, 가출하는 어머니, 폭력적인 큰 아들, 유약한 성격의 둘째 아들, 정신박약 증세를 가진 막내딸이라면 결코 평범한 집안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모습에는 무엇인가 우리와 아주 닮은 구석이 있으며 관객은 그 부분에 공감을 하는 것이다.

- 역설적으로 그린 잘못된 남성상의 폐해

극단적일 정도로 가부장적인 사고를 가진 큰아들 장정에 의해 이 가족과 장정 자신은 파국을 맞이한다. 이런 줄거리를 통해서 잘못된 남성상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장정이 배우고 익혀 온,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가족은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면 아들이 기필코 지켜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와 행동이 과연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다 주는가?

극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작가는 사회가 부여한 강한 남성상이 한 개인을 통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할 때 하나의 강박관념이 되고, 이것이 폭력충동(‘남자충동’)으로 변질되어 공격적인 성향을 띠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한다. 비극의 주인공이 흔히 그러하듯 장정의 비극은 판단 착오와 과도한 행동에서 비롯한다. 그는 자신의 폭력이 지나침을 알면서도 절제하지 못했으며, 사회가 심어 준 남성적 편견에 대해 균형 잡힌 해석도 하지 못했다. 극에서 이러한 ‘남자충동’은 피처럼 붉은 뱀으로 상징되어 무대에 중심 이미지로 가시화된다.

여러 가지 희극적 장치로 인해 극의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공연 중에는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 보고 극을 즐기는 관객들에게서는 웃음 소리가 이어진다. 그 웃음은 폭력을 희화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과장된 연기에서 생겨난다. 대사에는 진한 전라도 사투리가 녹아있다. 베이스 기타반주에 실린 노래가사 “머이매 멋져, 가이내 이뻐”도 처음엔 마치 외국어처럼 낯설지만 공연 후에도 그 노래와 가사가 오래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유정이 누이동생 달래에게 가르쳐주는 이 노래의 가사는 단순하지만 성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고정관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장정과 그의 가족들은 이러한 고정 관념이 낳은 폭력 충동의 희생자들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폭력적인 이미지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작가는 우리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관습과 고정 관념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폭력적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남성적 정체성을 찾지 못한 유정이나 남성성이 싫어서 여자가 되고 싶어 했던 그의 동성 연인 단단에게도 이 세상은 위기이다. 하물며 멋진 남성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폭력을 휘두른 장정에게도, 그가 가장 아끼던 여동생에게 우발적인 죽음을 당하는 이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가 가족을 위해 세상을 향해 겨누던 칼끝은 동생들에 의해 자기 자신을 향해 겨누어지게 된다.

- 유머러스한 독백으로 심각성 덜어

기법 면에서 등장인물이 자신들의 이야기 또는 속내 이야기를 관객에게 대화가 아닌 독백으로 직접 전하는 방식은 유머러스하다. 이 방식은 흔히 등장 인물의 내면을 전하기 위해 쓰이던 독백 또는 방백의 진지한 형식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행동하는 인물들은 마치 만화에서 자기 생각을 중얼거리는 캐릭터들을 연상시킨다. 사투리와 비어로 채워진 대사는 관객의 관심을 언어의 의미에서 표현 자체로 이전시키면서 상대적으로 극에서 심각성을 덜어낸다.

공연 내내 갖가지 음향효과를 내면서 극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베이스 기타연주, 일상 속에 침투한 폭력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일본식 다다미와 카페 무대, 배우들의 뛰어난 앙상블 연기, 멋진 남성을 표상하는 알 파치노의 브로마이드 앞에서 죽어가는 장정의 모습이 보여주는 아이러니, 흩뿌려지는 붉은 꽃잎으로 표현되는 죽음에서와 같은 몇몇 유미岵?장면들, 유머러스한 배우들의 몸짓연기 등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 때: 4월18일까지
■ 곳: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 작/연출: 조광화
■ 출연: 정진각, 황정민, 안석환, 이남희, 이유정, 김재만, 권오진, 오달수, 김상호, 강일, 양성철, 최광일, 조혜련, 엄기준, 장지아, 김윤태.
■ 연주: 황강록

송민숙 연극평론가


입력시간 : 2004-04-14 21:31


송민숙 연극평론가 ryu1501@korn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