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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의 세계] 죽 쑨 방송의 추억


생방송을 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돌발 사고가 발생한다. 그래서 진행자는 시청자가 느끼지 못하게 교묘한 방법으로 사고를 넘어가는 노하우를 터득해야 하는데,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바로 게스트의 긴장이다.

게스트는 주로 제조업체의 제품 관련 담당자다. 거의 방송 경험이 없다 보니까, 평소에는 유들유들하게 말을 잘하다가도 카메라 앞에만 서면 돌부처가 되는 사람이 태반이다. 특히 남자 게스트는 카메라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경우가 많은데, 스튜디오의 이질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메이크업을 위해 잔뜩 얼굴에 바른 분도 어색하고, 모니터에 나오는 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게스트는 제 정신을 못 차린다.

경험상 시작부터 당황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끝날 때까지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안녕하세요. 누구입니다”는 말 외에 한마디도 못하고 멀뚱멀뚱 시간만 보내게 된다. 이런 게스트와 방송하는 쇼호스트는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필자도 반갑지 않은 게스트를 여러 차례 만났다. 한번은 속옷이 다 젖을 정도로 고생한 경험이 있다. 네비게이션 방송을 할 때였다. 처음으로 소개하는 런칭 방송이었고, 제조 업체도 TV홈쇼핑 방송 경험이 없는 터라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게스트로 내정된 분께 “방송 경험이 없으신데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어봤더니 이 분 왈, “아, 뭐 제가 장교 출신이라 괜찮습니다. 거, 뭐 별 거 있겠어요?”라고 반문하는 게 아닌가? 장교 출신과 방송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하도 자신 있어 하길래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방송에 들어가는 날 터졌다. 쇼호스트가 먼저 오프닝 멘트를 하고 게스트를 소개한 뒤 제품 소개에 들어가는 것으로 방송 순서를 잡았다. 큐 사인이 들어오고, 필자가 카메라에 풀샷이 잡힌 상태에서 오프닝 멘트를 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게스트가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마냥 신기해 하는 것이었다.(보통 모니터는 29인치 TV로 카메라 앞쪽에 있다.) 그 분은 카메라 옆에 대본이 있고 쇼호스트가 그 대본을 읽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아무 것도 없이 쇼호스트가 주절주절 떠드니까 꽤 놀란 눈치였다. 오프닝을 마치고 게스트를 소개했는데, 이 때 카메라는 그 게스트를 풀샷으로 잡는다. 모니터에 본인 얼굴이 나오는 모습을 본 게스트는 카메라는 보지 않고 모니터만 계속 보면서 말을 더듬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그 날 방송은 종쳤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방송,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끌고 가야 한다. 어찌어찌 인사를 하고 제품 소개를 하는데, 작동 방법을 실연하면서 게스트에게는 아주 간단한 답변만 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진행을 했다. 게스트도 처음의 공황 상태에서 차츰 안정을 찾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것 저것 신경 쓰면서 방송을 하다 보니 그만 리모콘 작동 버튼을 잘 못 눌러 네비게이션 모니터에 엉뚱한 화면이 나오고 말았다. 잘 못 누르긴 했지만 ‘취소’ 버튼을 누르면 바로 전 단계로 넘어가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제품 작동이 쉽다는 것도 강조할 겸 일부러 “아 제가 잘 못 눌렀군요.. 그럼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죠?”라고 질문해 “아, 네 취소 버튼만 누르시면 바로 전 단계로 넘어가기 때문에 걱정할 것 없습니다”라는 답변을 기다렸는데, 여기서 그 분이 결정타를 날렸다. 다른 화면이 나오고 있는 네비게이션 모니터를 한 2초간 뚫어지게 보더니 동그란 눈으로 “이거 처음부터 다시 해야되는데요!”하는 게 아닌가?

이 장면을 집에서 본 동료 쇼호스트는 그만 배를 잡고 굴렀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 순간 만큼은 정말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오로지 둔기로 맞은 듯한 느낌만 기억에 남는다.

물론 그 게스트는 이후 방송은커녕 방송 전에 갖는 제품 회의 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게스트야 잘 해보자고 한 것이 그렇게 됐겠지만, 어떤 실수도 용납 안되는 것이 이 바닥의 생리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 게스트는 유아용 완구를 방송하는데 스튜디오에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부랴부랴 제품 컨셉에 맞는 다른 의상을 구해 입힌 적도 있다. 지나고 나면 너무나 재미있는 이야기지만 방송 당사자는 두 번이 아니라 몇 번 죽었다 살아나는 이야기가 TV홈쇼핑 채널에서는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진다.



문석현 CJ홈쇼핑 쇼호스트 moonanna@cj.net


입력시간 : 2004-04-15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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