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오르페' 등 비영어권 음악, 그 낯섬과 색다른 감동

[문화비평] 제 3세계론에 대한 반성, 혹은 월드 뮤직
'흑인 오르페' 등 비영어권 음악, 그 낯섬과 색다른 감동

별 생각 없이 언뜻 본다면(또 옐로 저널리즘을 지상의 목표로 삼은 듯한 방송 매체들의 무개념적이고 선동적 시각에 따르자면), 지금의 이 시대는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개성만이 인정되는 ‘좋은 시대’다. 그래서 너도 나도, 무가치하고 고리타분한 전통과 보수적인 사고 대신 늘 새로운 것, 눈에 띄는 것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조금만 독특하면 이내 열광에 빠져버린다. 정말이지 세상이 그렇게 변한 것만 같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와 우리 식구들한테는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으면서 “모든 국민들의 뜻”운운 하는 가증스러운 정치인들의 말처럼 들리는 이유가 뭘까.

기본적으로 매체의 모든 보도의 내용은 70% 이상이 사실에서 왜곡되어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트렌드, 공통의 가치관, 또 희망 등의 말들은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다. 이 시대의 개성이란 게 그럴 듯하게 포장된 ‘몰개성’이라는 말에 동감하는 이라면 몇 년 전부터 심심찮게 들려오는 ‘제3세계 음악으로의 초대’니 ‘제3세계 영화 여행’이니 하는, 여기저기서 남용되는 ‘제3세계’라는 말들에 혀를 찰 수밖에 없을 것이다. 10여 년 전 가짜 재즈 열풍이 불어 닥쳤을 때처럼 이 역시 기초적인 토대(개개인의 문화적인 아우라 또는 사회적인 인프라)가 전무한 상태에서 온통 그럴 듯한 말로만 포장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또 다른 문화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

동서간의 이념 분쟁이나 냉전이 끝난 지가 언젠데,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1세계와 공산권의 2세계에 속하지 않는 3세계 개발도상국이라는 용어가 등장을 하는 것인가. 결국 이후에 이 용어의 부적절함을 인정한 이들에 의해 ‘월드(world)’라는 말이 쓰이며 그 의미를 보다 포괄적으로 수용해 ‘월드 뮤직’이나 ‘월드 무비’라는 말이 보편화되긴 했지만, 미국과 일본, 유럽 선진국들 이외에서 등장한 문화의 양태는 우리에겐 여전히 생소하게만 느껴진다.

비영어권의 음악을 접하기 위해 우리가 부딪쳐야 하는 가장 큰 힘든 벽은 바로 언어이다. 어느 한 나라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언어의 습득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일 터이다. 예컨대 유럽과 남미,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등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없다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란 멀고도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영어 사용 국가들의 경우에는 영어로 번역된 풍성한 자료에 의지할 수가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제대로 된 자료 하나 찾기가 힘든 실정이다. 인프라가 절대 부족하다는 뜻이다. 물론 영어로 된 자료를 통해 정보를 습득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꽤나 번거로운 일이고 그 정보의 신뢰도 역시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남들이 좋아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는 죄로, 모든 것이 개개인의 몫으로 돼 버렸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해 일어를 배운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한때 이탈리아의 프로그레시브 록이 음악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을 때 난데없는 이탈리아어 열풍이 불었던 적도 있다. 사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이름이나 곡명을, 제대로 된 정확한 발음으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제3세계 음악’에 관심을 가져보고자 한다면 (언어까지는 힘들더라도) 최소한 해당 국가나 민족의 개괄적인 역사 정도는 습득을 해야 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남미의 음악을 듣고자 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접하게 될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이라는 용어는 남미의 각 국가들의 현대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 선봉에 서있는 인물들 중 한 명인 빅토르 하라(Victor Jara)의 생애와 음악은 칠레의 역사와 민중들의 투쟁 기록을 통해 또 다시 언급된다.

- 진정한 인터넷 시대의 개막을

물론 그 나라와 민족과 역사에 대한 아무런 정보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음악과 영화와 책을 접함으로써 새로운 문화에 눈을 떠가게 되기도 한다. 20세기 말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이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함께 불어 닥쳤던 체 게바라 열풍덕에 쿠바라는 나라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랐던 적이 있다. 폴 사이먼(Paul Simon)을 좋아하는 이라면 그가 1980년대에 들어 아프리카 음악과의 접목을 통해 남아프리카의 탁월?가수 미리암 마케바(Miriam Makeba)와 아카펠라 그룹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Ladysmith Black Mambazo)를 세계에 소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이디스미스 블랙 맘바조라는 그룹에 대한 자료를 찾으며 남아프리카의 역사와 원주민인 줄루족, 그들의 언어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얻기도 한다.

영화를 통한 접근은 시각적인 요소가 더해지기 때문에 (왜곡된 이미지를 얻게 될 위험성이 크긴 하지만) 보다 근사치의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마르셀 까뮈(Marcel Camus)의 ‘흑인 오르페(Orfeo Negro)’에 등장하는 브라질의 화려한 축제의 장면들과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의 멋진 음악들, 유고의 에미르 쿠스투리차(Emir Kusturica)가 만든 걸작 ‘집시의 시간(Dom Za Vesanje)’에서 볼 수 있는 집시들의 생활상과 고란 브레고비치(Goran Bregovic)의 탁월한 음악 등 우리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비영어권 국가의 영화들은 그들의 문화와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며 동시에 월드 뮤직의 보고(寶庫)로서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최근에는 인터넷 쇼핑의 발달로 인해 마음만 먹으면 세계 각지의 음악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가 있다. 때문에 문제는 무엇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정보를 취사선택 하느냐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별개의 요소들이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여러 나뭇가지들인 양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만나게 되고 새로운 줄기로 뻗어 나간다.

그렇듯 복합화 된 경험이 축적되어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가 그려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그 나무의 뿌리는 다른 나무의 뿌리와 얽혀 있다. 세계는 참 넓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이 여러 소리와 노래의 형태로 표출된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 간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다.

김경진(팝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4-22 15:17


김경진(팝 칼럼니스트) arzachel@seoulrecord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