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거울에 비친 삶의 스펙트럼안톤체홉 4대 희곡중 한 작품. 1896년 초연대본 사용이루지못할 꿈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묘사

[문화비평] 연극 <갈매기>
욕망의 거울에 비친 삶의 스펙트럼
안톤체홉 4대 희곡중 한 작품. 1896년 초연대본 사용
이루지못할 꿈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묘사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홉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4대 희곡의 하나인 <갈매기>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이번 공연은 얼마 전 발견된 1896년 초연 대본을 사용한다. 이는 현재 널리 알려진 <갈매기>의 이전 대본이므로 체홉이 자신의 작품에 가필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으나, 다소 긴 장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연출가인 지차트콥스키와 무대미술을 담당한 카펠류쉬는 3시간여의 긴 호흡과 깊이 있는 무대 사용으로 초연본 <갈매기>를 흥미롭게 형상화했다.

무대의 한 가운데는 극의 배경인 호수로 상정된다. 가늘고 긴 난간과 목책 등은 호숫가의 정경을 연상시킨다. 관객은 무대 디자이너의 상상력을 따라 마치 그곳이 호수인 양 상상하게 되고 배우들은 의자를 징검다리로 사용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을 건넌다. 무대 한 구석에 앉은 코러스 단원 한 명은 커다란 대야에 담긴 물을 손으로 저어 소리를 내면서 물의 흔들림을 청각 이미지로 만들어 낸다. 콘스탄틴이 호수에 돌을 던져 물수제비를 뜨면 무대 옆에서는 물 위에 돌이 튀는 소리를 내는 식이다. 무대에 자리한 피아노는 세련된 음향 효과를 만든다. 피아노 음향의 강약, 격정과 흔들림 등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떨림까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코러스의 합창은 호수 건너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아련하게 재현해냄으로써, 호숫가에 음악이 끊이지 않던 예전 시절의 분위기를 그려낸다. 바로 극중 인물들이 추억하는 대로다. 기존 극에 없는 코러스의 존재는 이 공연의 독특한 점이다. 이들은 소품을 나르거나 무대를 정리하고, 등장인물의 시중을 드는 하인 역할을 하거나 기계적인 동작으로 웃음을 불러 일으키면서 넓은 무대를 메우는 시청각적 이미지를 창출한다. 주인공보다 극의 분위기를 중시한다는 ‘코러스’의 원래적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코러스의 존재는 극적 갈등을 분산하고 은폐시킨다는 점에서, 체홉 특유의 극 세계에 대한 적절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 시청각적 이미지의 극대화

극중극을 시작할 때 무대 뒤편의 검은 장막이 찢어지면서 눈부신 광선이 객석을 비추는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연극 세계의 등장을 알리듯 충격적이고 도발적이었다. 극중극의 내용은 만물이 사라진 후 불멸의 영혼이 남아 물질의 표상인 악마와 대결을 벌이는 것으로, 이는 전혀 새로운 형식을 가진 상징주의적인 연극의 도래를 암시한다. 극중극 무대 뒤에 매달린 커다란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갖가지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 찬란하게 빛을 발하지만, 그 스스로는 차갑고 단단하다. 매끄러운 유리의 그 같은 물질성은 극도의 유약함과 파괴 가능성을 동시에 상상하게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불같이 뜨겁고 싫어하는 이에게는 얼음같이 차가운 극중 인물들(콘스탄틴, 니나, 마샤)도 이렇듯 양면적인 존재가 아닌가.

중심부가 비어 있는 거대한 샹들리에는 인간의 채울 수 없는 텅 빈 욕망을 상징하며 욕망의 대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등장인물들과 극의 중추를 표현하는 중심 이미지가 된다. 극의 후반부에 무대 가운데 매달려서 무대를 불완전하게 반영하는 커다란 장방형 거울도 또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 거울은 무엇이며 왜 제대로 된 상이 아닌 일그러진 상을 반영하는 것인가? 극 <갈매기>가 우리 주변의 삶을 보여 주는 인생에 대한 자기 반영적 성찰이며 비록 그 모습들이 왜곡되고 일그러져 있더라도 이를 있는 그대로 다시 비추어 보이고 있음을 관객에게 인식시키고자 한 것일까. 거울이 무대바닥을 채색하는 푸른 조명을 다시 반사하며 일렁이는 상을 만들 때 그것은 마치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마법의 호수와도 같아 보였다.

- 다양한 심리 담아낸 흥미로운 무대

<갈매기>는 이루지 못할 꿈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 대한 비유다. 등장 인물들의 일방적인 사랑은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써, 그런 인간에 대한 작가의 연민어린 시선을 읽을 수 있다. <갈매기>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 집착하는 사랑,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사랑, 질투하거나 절망하는 사랑의 모습들을 담고 있다. <갈매기>에는 질투하는 연인들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질투심은 아르카지나, 콘스탄틴, 니나, 마샤 등 모든 등장인물의 마음속에서 각양각색으로 일어나지만 특히 이번 공연대본에서는 폴리나의 질투심이 집요하게 묘사된다. <갈매기>는 인물들이 처한 물질적 삶을 세심하게 언급하는 사실성을 보여 준다. 메드베첸코는 자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마샤에게 호소하고, 아르카지나는 인색하며, 쏘린은 경제적 궁핍 때문에 그가 바라던 도시 생활을 하지 못한다.

<갈매기>는 예술에 대해 미학적 논쟁을 벌이는 예술가들에 대한 연극이다. 등장인물들은 여배우이거나 여배우 지망생, 소설가이거나 극작가 지망생, 또는 새로운 예술을 감식하는 관객의 입장에 있다. <갈매기>는 가족간의 대립, 계층간의 대립, 세대간의 대립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립적인 요소들 간의 극적인 충돌 그 자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삶의 다양한 견해들을 담아내고 피력하기 위한 것이다. <갈매기>는 삶에서의 가능한 선택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예시한다. 인생은 니나가 깨닫듯이 인내하며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인가, 콘스탄틴의 선택이 그러하듯 참을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것인가. 니나는 무명의 배우임에도 자신의 소명을 자각하고 굳세게 살아가리라 결심한다. 반면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둔 콘스탄틴은 니나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있음을 알고 결국 죽음을 택한다. 체홉은 이들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 그들의 내면에 대한 설명을 하거나 판결을 내리지 않으며 등장 인물들의 인식을 통해 관객의 성찰을 유도한다.

윤주상(도른)의 연기는 안정적이다. 정동환(쏘린)은 평소 그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절제하는 데서 오히려 연기의 역량을 보여 준다. 이혜진(니나)은 꿈 많은 소녀에서 삶을 체험한 여인으로 변화해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등장 인물들의 제스처는 다소 과장되어 있었지만 <갈매기>는 연출가 지차트콥스키가 시도한 철저한 장면 연구의 결과들을 잘 보여준 흥미로운 무대였다.


■ 때: 5월2일까지
■ 곳: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 원작: 안톤 체홉
■ 연출: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
■ 무대미술: 에밀 카펠류쉬
■ 출연: 정동환, 윤주상, 남명렬, 정재은, 오만석, 이혜진, 손진환, 추귀정, 박종현, 이승비, 이동윤, 임철수, 전지욱, 이형근, 이은희(피아노).

송민숙 연극평론가


입력시간 : 2004-04-28 17:11


송민숙 연극평론가 ryu1501@korn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