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 흑인들의 의식과 염원 그리고 고난의 역사 상징

[문화비평] 밥 말리의 '레게' 뿌리를 향한 열망의 리듬
자메이카 흑인들의 의식과 염원 그리고 고난의 역사 상징

오랜 세월동안 행해진 백인들의 인종 차별과 월권 행위는 라틴아메리카 소수 민족들에게 뿌리 깊은 한(恨)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그것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정책과 권리 회복을 위한 운동으로 발전 되었고, 숱한 역사적 사건들을 만들어 낸다. 자메이카 역시 그 흐름 속에 존재한다.

자메이카는 300년 이상의 오랜 세월 동안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다, 1962년에 와서야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자메이카 전체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흑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노예로서 그 땅에 정착했을 때부터 무의식 깊은 곳에 저항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의식의 바탕 위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그것은 카리브해 연안 국가들이 겪은 공통된 역사적 배경이 되기도 하는데, 그 근원에는 그들 정체성의 한 부분을 이루는 ‘ 아프리카’가 존재한다. 아프리카와 유럽의 문화가 혼합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데 레게(reggae) 또한 예외가 아니다. 자메이카라는 지역적,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음악인 레게는 순수한 음악적 측면 외에 자메이카 인들의 의식의 뿌리를 이루는 사상과 종교, 그리고 민족적인 염원을 담아 표출해내는 도구이자 그들의 고난의 역사를 상징하는 위대한 문화의 산물이라는 가치를 지닌다.

- 스카와 리듬 앤 블루스의 결합

밥 말리(Bob Marley)가 등장한 이후 레게 음악은 대중 음악에서 일반화된 하나의 장르로서 받아 들여지게 되지만, 사실 이 음악 형식은 자메이카의 전통 음악에 기원을 두는 음악인 스카(ska)와 뉴올리언스의 리듬 앤 블루스의 결합에서 비롯되었다. 스카는 아프리카의 리듬을 차용한 토착 음악인 멘토(mento)에서 발전한 양식으로, R&B의 셔플(shuffle) 리듬과 칼립소(calypso), 아프로 큐반(Afro-Cuban), 재즈와 로큰롤 등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 요소와 트럼펫이나 색소폰 등의 관악기 사운드를 포함한다. ‘쿵짝쿵짝’ 하는 4박자의 리듬 중 뒷부분의 박자에 강한 액센트가 실린 스카 특유의 흥겨운 리듬은 1960년대 초반 커다란 인기를 얻으며 자메이카의 대중 음악으로 자리하게 되었고, 이후 현저한 베이스음과 비트가 강조된 록 스테디(rock steady)로 발전을 하며 현대적인 의미의 레게로 거듭나게 된다. 보다 느려진 템포의 리듬과 짧게 끊어지는 박자의 묵직한 베이스 라인, 그리고 스크래치 기타(scratch guitar) 사운드로 특징 되는 레게는 이후 다양한 요소와 결합하며 팝의 새로운 사운드 실험을 위한 훌륭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특정 지역의 민속 음악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레게가 팝 음악계에 끼친 영향력은 가히 혁명적인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여러 아티스트나 그룹들뿐 아니라 펑크를 비롯하여 최근의 힙합, R&B에 이르는 여러 장르의 음악들이 레게의 영향을 받아 왔는데, 레게를 바탕으로 한 대표적인 사운드는 흔히 ‘ 인스트루멘탈 레게’로 일컬어지는 더브(dub)이다. 즉, 베이스와 드럼 등 리듬 파트를 제외한 모든 사운드를 제거하고 그것을 다양한 효과음들로 대체하는 방식으로서,은 이후 현대의 테크노에서 응용되고 있다. 또한 레게의 규칙적인 리듬이 지니는 특유의 흥겨운 감정과 풍성한 표현력이 하나의 ‘ 열린 장르’로서 다른 음악들에 보다 쉽게 녹아 들어갈 수 있었던 까닭에, 폴 사이먼이나 에릭 클랩튼, 롤링 스톤즈, 이글스, 블론디, 클래시, 보니 엠 등 장르를 불문한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레게를 자신들의 음악에 차용한 것이다.

- "흑인 천국 아프리카로 돌아가자"

앞서 말한 바대로 레게는 단순히 듣고 즐기기 위한 순수 음악으로서의 기능 이상의 역할을 하는 음악이다. 자메이카 인들에게 레게 음악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이상, 즉 유토피아를 향한 열망을 담은 정신적인 뿌리 또는 축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독특한 문화 양식은 그들에게 있어 복음서의 교리와도 같은 가치를 지니며, 그것은 레게에 강한 혁명성을 부여해줌으로써 그들의 결속을 더욱 강하게 해주는 매개체로서 역할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이라는, 우리에겐 생소한 그들의 종교가 자리한다. ‘ 라스타주의’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은 간단히 말해 “ 백인들이 판을 치는 서구화된 사회를 떠나 흑인의 천국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사상이다. 자메이카의 민중들에게 자메이카라는 현실은 미국과 유럽의 자본에 지배당하는 고통으로 가득한 땅이며, 그들은 순수한 자연적 세계이자 자신들이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이상향인 아프리카로의 복귀를 열망했다.

라스타파리아니즘은 라스 타파리 마코넨(Ras Tafari Makonnen)이라는 본명을 가진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Haile Selassie)로부터 비롯되었다. 1930년 그가 에티오피아의 황제로 즉위했을 때, 자메이카의 가난한 민중들은 솔로몬 왕의 직계 후손으로 선포된 그가 ‘ 왕들의 왕’이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구세주, 살아 있는 신으로 생각했다. 사실상 아프리카의 토착 신앙에 기독교와 유태교, 그리고 이집트의 종교관의 요소가 혼합(라스타주의의 신을 일컫는 말인 ‘야(Jah)’는 성경의 하나님을 일컫는 ‘여호와(Jehovah)’의 단축어이다)된 라스타파리아니즘은 자메이카 인들에게 있어 완전한 종교일 뿐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서 그들의 생활 자체에 스며들어 있다.

일례로 우리에게 흔히 레게파마로 알려진, 머리를 여러 가닥으로 땋아 내린 자메이카 특유의 헤어스타일 ‘드레드록스(dreadlocks)’는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빗질을 하는 것이 철저히 금지된 라스타주의의 교리에 의한 것이다. 또한 가난과 (권력에 의한) 압제, 불평등과 같은 사회의 문제를 표면화함으로써 그것을 사회 운동으로 연결시키는 등의 행동은 이 사상이 그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이들의 가치관과 이념을 담은 음악인 레게를 통해 전 세계에 자메이카 인들의 마음속의 외침을 전해주었던 밥 말리가 국민적 우상으로 자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라스타파리아니즘 담아낸 음악세계

밥 말리는 레게가 팝 계에 끼친 영향력의 바탕에 우뚝 서 있는 아티스트이다. 레게 하면 우선 밥 말리를 떠올릴 정도로 그의 이름은 장르와 동격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평가는 그가 영국과 미국에서의 활동과 투어를 통해 보다 많은 대중에게 레게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는 외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 볼 수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통 레게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 안에서 자신만의 매력을 뿜어내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그의 음악이 지니는 가치가 단순히 저항적인 내용의 사회 고발이나 평화와 정의와 사랑을 부르짖는 등의 심각한 메시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메이카의 전통 민속음악과 포크, 록의 적절한 조화로 펼쳐지는 사운드는 흡사 한없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외피에 둘러싸인 풍부한 과즙의 열매를 연상케 한다. 한 입만 베어 물면 달콤하고 향긋한 맛이 온 입안에 가득 차는 탐스런 열매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달콤한 열매라도 계속해서 먹는다면 그 맛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10장이 넘는 그의 정규 앨범들은 사운드 면에서 특별한 차이를 지니지 않고 유사한 형식과 분위기로 일관한다. 그것은 고스란히 레게라는 장르가 지니는 한계로 귀결되며, 앨범보다는 싱글 지향일 수밖에 없는 장르 내에서 아티스트의 다양한 음악적 실험이나 음악 미학적 측면에서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각의 앨범들에 담긴, 영혼을 정화시켜주는 듯한 여러 작품들이 과소 평가 될 이유는 없다. 단순한 리듬의 음악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꾸밈없이 담아 낸 그의 음악은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가 지녔던 사고와 가치관, 그리고 정서는 자메이카라는 한정된 지역과 라스타파리아니즘이라는 사상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그 모든 경계를 넘어 ‘ 인간’에 교감했다. 그것이야말로 밥 말리의 음악이 가지는 가장 큰 힘이요, 그에 의해 완성된 레게가 갖는 참된 매력일 수 있는 것이다.

김경진 음악평론가


입력시간 : 2004-05-19 21:26


김경진 음악평론가 arzachel@seoulrecord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