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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속으로] <블러디 선데이> 시사회
상처로 남은 역사의 아픔
아일랜드 판 '임을 위한 행진곡', 영국군에 의해 짓밟힌 '그날'




이처럼 ‘썰렁’했던 기자 시사회도 드물 것이다. 드넓은 객석에는 스물 남짓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으며, 어떠한 특별 행사도 치러지지 않았다. 하긴 출연 배우나 감독, 제작자 등이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국산 영화가 아닌 바에야 무대 인사나 기자 간담회 같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저 먼 나라 아일랜드로부터 배달되어 온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기자 시사회는 광화문의 씨네큐브에서 매우 차분한 느낌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날, 5월 28일의 오후는 만 하루 동안 계속되던 비로 도시의 모든 풍경들이 축축하게 젖어 가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구비 구비에 비명 소리와 핏빛이 물든 거리 그리고 총성이 상흔으로 남아있듯, 다사다난했던 아일랜드의 현대사도 곳곳에 상처의 기억을 보듬고 있다. 그 기억이 ‘ 1972년 1월 31일’이라는 구체적인 시간에 머물고 나면, 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 깊은 슬픔’에 젖어 드는 듯 하다. 마치 우리가 ‘ 1980년 5월 18일’이라는 시간을 떠올릴 때 그러하듯이.

북아일랜드 데리 시 주민들의 평화로운 행진이 영국군 공수 부대의 총격으로 인해 무참히 짓밟힌 그날을 사람들은 ‘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라 명명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찍어 역사적 사건의 현장감을 극대화시킨 이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꾸 그 영상 위에 겹쳐지는 것이 ‘ 광주’다. “ 한국에서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비극적인 학살이 벌어졌으며, 놀랍게도 그날 역시 일요일이라고 들었다. 광주에서 정의와 진실을 위해 투쟁한 분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하며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이 영화의 공동 프로듀서 돈 뮬란의 마음에 공감이 가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로 지난 2002년 베를린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거친 질감의 화면 속에 ‘ 데리의 학살’을 고스란히 잘 담아냈다. 110분의 러닝타임 동안 그 영상을 아무런 느낌 없이 응시할 수 있는 강심장의 소유자라면 차라리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게 낫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 차분히 응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분노해야 한다!”는 절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무겁게’ 시작한 이 영화의 끝 역시 무겁게 마무리되었다. 영화가 끝나자 아일랜드의 세계적인 록밴드 U2의 노래 ‘ Sunday, Bloody Sunday’가 흘러 나왔다. 그 노래에는 슬픔과 분노의 느낌이 가득했다. 상영관 출입구 옆에는 <블러디 선데이>를 광고하는 자그마한 벽보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배급사에 아는 사람이 있어 혼자 이 영화를 보러 왔다고 했다.

“정말 재미 있었어요. 하지만 나중에 이 영화 볼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뒤쪽 좌석을 예매하라고 일러줘야겠어요.” 카메라가 너무 흔들려서 조금 어지러웠다는 그 여자는 얼마 후 어디론가 총총히 사라졌다. 나는 아무도 남지 않은 그 곳에서 물끄러미 <블러디 선데이> 광고 벽보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현기증이 몰려 왔다. 어지러운 역사를 홀로 대면하는 일이란 여전히 버거운 일이라는 생각이 밀려 들었다.

내가 건물 밖으로 나섰을 때, 빗줄기는 극장에 들어섰을 때보다도 더욱 굵고 거세어져 있었다. 그렇게 자꾸만 젖어 가는 도시 속으로 나는 자그마한 우산을 펴들고 걷기 시작했다.



이휘현 자유기고가 noshin@hanmail.net


입력시간 : 2004-06-0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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