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원조는 '노란샤스의 사나이'?7080세대 노래 부활 등 문화적 복고 붐LP시대 가요들 대중적 인기 저변에 새삼 눈길

유행가를 통해 본 시대상
한류 원조는 '노란샤스의 사나이'?
7080세대 노래 부활 등 문화적 복고 붐
LP시대 가요들 대중적 인기 저변에 새삼 눈길


대중은 즐겨 듣고 불렀던 노래가 어떤 이유로 유행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대중 가요는 그 시대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와 밀접한 관계 속에 탄생되어 왔다. 1990년대 들어 노래는 10대를 위한 상품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7080세대의 음악이 부활하는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복고 붐이 사회 전반에 불어 닥치고 있다. 그것은 가요의 LP 시대에 대한 향수로 이어지고 있다.

1910년 빅터 레코드사가 처음으로 백춘재의 유성기 SP음반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인 음반 시대가 열렸다. 1926년 나운규가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 아리랑’이 인기를 얻으면서 신민요 ‘ 아리랑’이 민족 가요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음반이 등장했다. 최초의 번안 곡인 이 노래는 순종의 장례식 날,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던 6ㆍ10만세 운동 시기에 민족의 서러움을 반영한 조곡 역할을 해주었다. 또 당시 이난영의 ‘ 목포의 눈물'은 5만장이란 경이적인 판매 기록을 세우며 가요의 전성기를 열었다. 한편 6ㆍ25 전쟁으로 전중 가요가 양산됐다. 슈퍼스타 현인은 ‘전우야 잘 자라’로, ‘ 가거라 삼팔선'과 ‘ 굳세어라 금순아'로, 이해연은 ‘ 단장의 미아리 고개’로 상처 받은 민족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 '목포의 눈물' 가요 전성기 열어

1950년 10월 4일 AFKN 방송에서 이어 1956년 최초의 상업 TV인 HLKL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는 컨트리, 포크, 블루스, 재즈, 록큰롤 등 미국의 팝 음악이 본토로부터 직수입되었음을 의미한다. 팝 음악이 밀려든 이 시기에는 서구에 대한 맹목적 동경 때문에 황당한 서구 지향적 노래들이 판쳤다. 바로 ‘ 슈사인 보이’, ‘페르샤 왕자’,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아리조나 카우보이' 등등. 1953년부터 미군들의 여흥을 위해 미8군 가수들이 탄생되었다. 김시스터즈를 시작으로 김치 캐츠와 60년대 초반 가요계의 판도를 뒤바꾼 한명숙, 최희준, 유주용, 이금희, 송춘희, 패티 김, 코리안 키튼즈의 윤복희 등이 이때 등장했다. 1957년 경, 전후 복구가 진척되면서 레코드사들이 하나 둘 생겨나며 10인치 LP음반이 등장했다.

61년 발표된 한명숙의 트위스트 곡 ‘ 노란 샤스의 사나이' 는 미 8군 가수들의 신호탄으로서, 자유당 정권의 3ㆍ15 부정 선거와 4ㆍ19 혁명 등으로 우울했던 사람들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었다. 또 대만, 태국 등 동남아 국가에서도 열광적 반응을 얻으며 한류 열풍의 원조곡이 되었다. 61년에 문화, 63년 동아, 64년에 동양라디오가 각각 개국했다. 또한 61년에는 KBS, 1964년에 민간 상업방송 TBC, 1970년에 또 하나의 민간 방송인 MBC의 개국으로 본격적인 TV 영상 시대가 열렸다. 또한 1962년에는 33과 1/3회전의 12인치 LP시대가 열렸다. 최초의 12인치 LP음반은 미 8군 출신의 여성 듀엣 김치 캐츠의 '검은 상처의 블루스'.

1964년은 중요한 해이다. 최초의 록 음반이 ‘키 보이스'와 신중현의 '에드 훠'에 의해, 또 서수남 하청일 등의 4인조 남성 포크 그룹 '아리랑 브라더스'에 의해 최초의 포크 음반 또한 동시에 탄생되었기 때문. 하지만 주류 음악은 여전히 트로트였다. 대표적인 노래는 64년에 발표되어 10만장을 판매 기록을 세운 이미자의 ‘ 동백 아가씨'다. 트로트를 천시했던 충무로 음악 감상실 '세시봉'과 ‘서린’ ‘동경 음악실’의 젊은 대학생들조차 '동백아가씨'를 합창으로 따라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하지만 65년 말, 방송윤리위에 의해 '동백아가씨'를 비롯 37곡이 왜색 가요라는 이유로 금지 족쇄가 채워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금지 곡 '동백 아가씨'가 당시 박대통령의 애창곡이었다는 사실.


- 군사정권 시대의 금지곡 망령

비약적 경제 성장으로 문화 의식이 높아진 군사 정권 시대는 금지곡 망령이 드셌다. 66년에는 김상국의 ' 껌 씹는 아가씨'등 64곡이, 67년에는 ' 방앗간 집 둘째 딸' 등 95곡이 금지되었다. 정부 주도로 ‘ 새마을 노래'와 ‘예비군가', ‘잘 살아 보세' 등 소위 건전 가요가 등장했다. 국민들은 최초의 노래 동아리였던 포클로버스 멤버(최희준, 유주용, 위키리, 박형준 등)들의 노래, 봉봉사중창단의 '꽃집의 아가씨',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타 김' 등 도시를 배경으로 한 밝은 댄스 풍의 노래를 애창했다.

68년 11월, 미국에서 건너온 히피 청년 한대수와 송창식, 윤형주의 트윈폴리오의 등장은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장발로 대변되는 ' 청년 문화'와 통기타 열풍을 몰고 왔다. 한대수는 톱으로 연주를 하는 전위적인 모습과 치렁치렁한 장발로 화제가 되었다. 그는 ' 물 좀 주소', ' 고무신'등 창작 곡으로 모던 포크의 창시자가 되었지만 금지와 통제의 멍울에 좌절했다. 또 한 명의 중요 인물 김민기. 71년 발표된 그의 데뷔음반은 사랑타령으로 일관된 대중 가요를 시적인 수준으로 높이는 전환점을 이뤘다. 또 서유석, 양병집, 양희은, 김의철 등 또한 시대의 아픔을 겪은 아티스트로 손꼽힌다.

록의 대부 신중현은 ' 신중현 사단'을 형성했다. 펄 시스터스, 김추자, 김정미, 이정화, 임아영, 김상희, 박인수, 장현 등은 대표적인 가수들. 68년 그룹 덩키스 시절부터 록과 국악을 접목하는 실험적인 사이키델릭 음악을 시도했던 신중현의 60~70년대 음반 대부분은 가요계의 황제로 군림케 하고 있다. 최고의 사이키델릭 여가수로 불리는 김정미의 음반들은 100만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청와대로부터 ' 대통령을 위한 곡을 작곡해 달라'는 제의를 거절했던 그는 결국 ' 대마초 왕초'로 낙인이 찍혀 사실상 음악 활동을 접어야 했다.

72년 록 그룹 김트리오 멤버에서 솔로 데뷔 음반을 발표한 가요의 황제 조용필은 통기타를 치며 '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했지만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76년에 재발표를 하면서 10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조총련계 재일 교포들의 고향방문 물꼬가 트인 시점과 절묘한 궁합을 이뤘기 때문. 김추자의 ' 거짓말이야'가 선풍적이었던 1974년은 보석 부인 사건 등 불신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당시의 청년 문화 선풍은 75년 '가요 정화 운동'으로 일컬어 지는 긴급조치 9호로 무려 222곡이 금지 곡으로 묶이면서 맥이 끊겼다.


- 통기타와 청년문화의 발흥

현숙의 '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는 중동 건설 붐으로 수 만 명의 해외파견 근로자들이 생겨나면서 사회문제가 되었던 바람 난 아내들을 겨냥해 히트한 노래였다. 77년에 시작된 MBC대학가요제는 캠퍼스음악을 등장시켰다. 주인공 심수봉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총소리와 함께 활동금지 멍에를 쓰고 ' 그 때 그 여인'으로 한동안 기억되었다. 하지만 ' 그 때 그 사람'은 더욱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84년 해금이 된 후 발표한 그녀의 격조 높은 트로트 곡 ' 무궁화'는 ' 고 박정희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모호한 이유로 방송 금지 처분을 받았다.

80년대에도 외교적인 이유로 정광태의 노래 ' 독도는 우리 땅'이 금지되는 등 정부의 통제 정책은 계속됐다. 이후 많은 작가들이 미리 자신의 작품을 순화시키는 풍조가 일반화되면서 대중 음악은 크게 뒷걸음질했다. 정수라의 ' 아! 대한민국'과 민심 수습을 위해 열렸던 관제 행사 ' 국풍81'의 금상 수상곡인 이용의 ' 바람이려오'는 정권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탄생한 히트 곡. 83년 6월 전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설운도의 ' 잃어버린 30년'을 탄생시켰다. 마침 KAL기 피격 사건과 아웅산 폭파 사건 등으로 북에 대한 반감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분출된 한 해였다. 87년 민주화 항쟁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축으로 하는 민중 가요의 전성 시대를 열었고 96년 정태춘의 외로운 투쟁 덕에 가요 사전 심의와 금지 조치가 사라지게 되었다.

92년 '서태지와 아이들'에 의해 도입되어 신드롬을 일으켰던 랩과 댄스음악은 현재까지 이어지며 막강한 기세의 ' 신세대 음악' 시대를 열었다. 서태지는 젊은이들에게 ' 문화 대통령'으로까지 추앙 받고 있다. 이후 대중 음악은 스타 시스템이 도입되며 거대한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글ㆍ사진/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7-07 11:23


글ㆍ사진/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