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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영웅, 그들이 돌아온다
이순신에서 정주영까지, 불멸의 화신으로 드라마·영화·출판계 석권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愼勿言我死) 불멸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에서 해신(海神) 장보고, 도마 안중근, 경제계 거성 정주영과 이병철까지. 영웅(英雄)이 부활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조차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심과 용맹을 지닌, 외적으로 강하면서도 내면의 고뇌와 여린 심성을 함께 지닌 불세출의 영웅들이 돌아오고 있다.

2004년 여름, 문화계를 뜨겁게 달구는 화두는 단연 영웅이다. 영웅들은 시름에 빠져 있는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불멸의 화신이 되어 드라마와 영화, 출판계를 석권하고 있다.


- 한국경제의 신화 그린 '영웅시대'





7월 5일부터 전파를 타기 시작한 MBC 월화드라마 ‘영웅시대’(극본 이환경, 연출 소원영ㆍ박홍균)는 아예 제목부터 영웅을 내걸고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1960~70년대 경제 개발의 주역이었던 재벌과 측근인 전문 경영인의 관계를 그린 이 드라마는 현대와 삼성이란 국내 굴지의 대기업의 창업주를 모델로 했다는 점에서 민감한 반응을 촉발시켰다. 이들이 뛰어난 경영인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지만, 영웅이라는 칭호를 달기에는 부적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도 뒤따랐다. 하지만 그 덕분에 시청률은 상승곡선을 타고 있다.

방송 첫 주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영웅시대’는 이후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이 방송되면서 시청률이 떨어지는 듯했으나 최근 주인공인 차인표 전광렬이 등장하면서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다. 8월 10일 12회 방송분에서 20.6%를 기록, 같은 시간대에 방송된 ‘장길산’(14.1%)과 ‘구미호외전’(13.8%)을 가뿐하게 따돌렸다.(TNS미디어코리아 집계)

영웅은 현대극에서만 빛을 발하는 게 아니다. KBS가 9월 4일부터 방영하는 100부작 대하사극 ‘불멸의 이순신’(극본 윤영수, 연출 이성주)도 벌써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충무공이 노량대첩에서 왜군의 총탄에 맞아 숨지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해 그의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가설을 제기할 예정이다. 오는 11월 17일 첫 전파를 탈 KBS 50부작 수ㆍ목드라마 ‘해신(海神)’(극본 박상현ㆍ정진옥, 연출 강일수) 역시 해상왕 장보고를 앞세워 전형적인 영웅 신화를 재창조하는 데 도전한다. 목수의 아들이란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장보고가 노예 검투사, 호위무사 등으로 고난의 길을 극복하는 과정을 집중 조명한다.


- 최배달·안중근 등의 거친 삶 재조명

(위에서 부터)KBS '불며르이 이순신", KBS '해신', 영화 '바람의 파이터', 영화 '역도산'

스크린에서도 영웅의 활약은 눈부시다. 12일 개봉한 영화 ‘바람의 파이터’는 개봉 첫 주 전국 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할리우드 대작 영화들을 큰 차이로 앞질렀다. 흥행 돌풍의 원동력은 극진가라데의 창시자 최배달의 영웅적인 실화가 주는 힘과 감동이다.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간 최배달이 갖은 수모와 고초를 이겨내고 최고의 무도인으로 성장해가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7일 개봉 예정인 ‘도마 안중근’(감독 서세원)과 최근 촬영을 끝낸 ‘역도산’(감독 송해성)도 고난의 시대를 온 몸으로 헤치며 살았던 실존 인물들의 영화화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 ‘도마 안중근’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ㆍ사살한 사건을 전후한 11일 동안의 행적을 쫓아간다. 설경구가 주연한 ‘역도산’은 39세의 나이에 요절한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거친 삶을 그렸다.(12월 개봉 예정)

이렇듯 TV와 스크린을 넘나들며 거세게 불고 있는 영웅 바람의 진원지는 출판계다. KBS ‘불멸의 이순신’의 공동 원작은 김훈의 ‘칼의 노래’와 김탁환의 ‘불멸’ 두 편의 소설. 絹?작품은 최근 영웅 열풍의 불씨가 됐다. 2001년 4월 출간된 ‘칼의 노래’는 지금까지 40만부가 넘게 팔렸고 1998년 첫 출5?‘불멸’은 최근 전 8권 분량의 ‘불멸의 이순신’으로 개작됐다. 이밖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인생 역정을 소설화한 ‘잃어버린 영웅’과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경영철학을 파헤친 ‘이병철 경영대전’ 등도 최근 출간돼 눈길을 모으는 영웅담이다. 7월 초 ‘잃어버린 영웅’을 낸 도서출판 찬섬의 임영훈 과장은 “휴가철인데도 불구하고 하루 1,000부 이상의 주문이 들어올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지금 영웅인가? 우선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처럼, 어려운 시대 상황 때문에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영웅이 문화코드로 급부상한다는 게 공통적인 견해다.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민족 경제를 일군 고 정주영 회장께 머리가 숙여진다. 고교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이런 꿈과 비전을 심고 싶다.”(은상철) 드라마 ‘영웅시대’ 게시판에 올려진 시청자의 말이다.


- 침체된 사회 분위기 반영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의 영웅 열풍은 침체된 사회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으레 영웅 담론이 많이 나타나기 마련”이라며 “사회 분열이 가중될수록 그 해결을 기대하는 대중들의 강렬한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계 인물들의 영웅상 부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 우리 국민들의 경제 위기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반증인 셈이다.

하지만 이 같은 영웅 바람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문학평론가 김동식씨는 섣부른 ‘영웅 대망론’을 경계했다. “현대인들이 영웅을 찾는 건 이순신의 도덕성과 합리성 등 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가치’의 리더십을 제시하기 때문이지, 구국 영웅의 이미지가 필요해서는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 영웅들의 위대함은 맨주먹에서 신화를 일궜다는 점에 있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주영, 이병철 같은 ‘맨 주먹’에 관한 추억은 우리를 가슴 들뜨게는 하지만, 결코 현실에서 되살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과거 격동기와 달리 현 시대는 경제적 계급과 신분이 고착됐기 때문”이라고 김씨는 설명한다.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는 희곡 ‘갈릴레오 갈릴레이’에서 갈릴레이의 제자 안드레이의 입을 빌어 “영웅이 없는 시대는 얼마나 불행한가”라며 탄식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영웅의 부재보다 ‘맨주먹의 신화’를 영원히 잃어가고 있음을 더 슬퍼해야 할 지 모른다. 다시 현실에서 마주하지 못할 영웅을 픽션에서나 그려보면서 말이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


입력시간 : 2004-08-18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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