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서에 내제된 생의 아픔과 회한의 표현로르카의 비극, 한국적 제의 결합 보여줘

[문화비평] 극단 자유 <피의 결혼>
인간 정서에 내제된 생의 아픔과 회한의 표현
로르카의 비극, 한국적 제의 결합 보여줘


혼례장면

20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의 비극 ‘피의 결혼’(1933)은 시적 상징과 은유가 풍부한 시극(詩劇)이다. 이 극은 ‘예르마’(1934),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1936)과 함께 로르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혼례를 마친 가 신랑을 저버리고 옛 연인과 함께 도주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피의 결혼’은 , 신랑, 사내 등 등장 인물의 호칭이 지칭하듯 이들의 개별적 실체보다는 이들 사이에 구축되는 긴장 관계와 상징적인 분위기가 더욱 중요한 극으로, 숙명과도 같은 본능의 힘이 불러 일으키는 비극적 정서를 보여 준다.

도주한 연인들의 뒤를 쫓아온 신랑은 사내와 결투를 벌이고,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과 죽음을 형상하는 인물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두 남자는 죽음을 맞는다. 죽음에 이르는 사랑, 즉 타나토스로 이어지는 에로스를 배경으로 하는 간략한 줄거리와 함께 등장 인물들이 표출하는 갖가지 비극적 감정들이 무대에 펼쳐진다.

에게 버림받은 신랑의 배신감,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슬픔(사내의 아내),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비탄과 그 원인인 며느리에 대한 증오심(신랑의 어머니), 연인과 사별한 여인의 슬픔과 회한, 죄의식() 등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는 작품이다. 시극인 만큼 공연의 면에서 극의 줄거리나 주제적 결론, 또는 등장 인물의 성격이나 배우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보다는 보편적 감정과 비극적 정서의 표출, 그리고 무대화하는 표현 과정이 중요하며 그런 만큼 각 장면의 공연 가능성이 다양하게 열려있다.

한국적 각색과 희비극적 톤
극단 자유는 1982년 이 작품을 초연한 이후 수 차례에 걸쳐 국내외의 무대에 올려왔다. 공연의 특색은 한국적인 각색 또는 번안과 극이 취하는 희비극적 톤에 있다. 한국적 각색의 예로는 탈과 인형, 한복 등의 시각적 요소들, ‘평토제’와 장례식(1장), 함 팔기와 혼례식(3장) 등의 관습, 가면을 들거나 쓰고 코러스로 등장하는 광대들의 존재 등이 있다.

이는 공연에 원작과 다른 독특한 색채를 부여하는 동시에 스페인의 극을 지금, 이곳 한국에 고유한 사건으로 토착화 또는 현재화함으로써 시각적으로 공연을 재해석하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흑과 백의 단순한 대조만으로 시각적 대비가 극대화된 의상, 슬픔과 비탄을 가시화하기 위해 신랑의 어머니가 바닥에 끌고 다니는 아들의 삼베 수의, 혼례의 의식에서 공간의 비움과 채움을 한정짓는 기능을 하는 천막의 미학, 특히 익명의 코러스를 형성하는 가면들이 숲을 형상화하는 그물 천 뒤에 숨어서 빛을 받으며 빛을 형상화하는 인물의 시적 대사 뒤에서 숨을 죽이고, 죽음을 형상화하는 인물이 전하는 파국의 소식을 듣는 장면의 미학은 빼어나다(6장).

그러나 공연이 선택한 어조는 극의 주제나 극 효과를 불분명한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 온다. 치정 살인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가져오는 파국에 희극적 막간극을 삽입함으로써 공연은 삶의 본질로서의 희비극성 또는 현시대의 연극의 흐름인 희비극성의 관점을 구현하기 보다는, 이유 없이 비극과 희극의 정서를 오간다. 떠들썩하게 함을 파는 장면, 동냥하는 거지패의 등장과 재담, 남녀의 배역이 의도적으로 바뀐 가짜 신랑과 가 벌이는 촌극(3장), ‘막간의 분장실’이라는 팻말과 함께 배우들이 벌이는 세태 풍자극(5장)이 그 예이다. 분명히 관객의 긴장을 풀고 재미를 더 할 의도로 삽입되었을 이 장면들은 그러나 동시에 극의 흐름과 진지함의 나사를 풀어 놓고 극의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는다.

‘피의 결혼’이라는 시극이 가지는 상징적 분위기는 공연에 삽입된 서사적 풍자와 아쉽게도 충돌한다. 각색 과정에서 사건 진행의 순서를 장례식과 혼인식으로 재배치한 플롯에서도 적절한 이유를 읽기가 어렵다. 탄寬?살아 남아서 신랑의 어머니(박정자 분)의 미움을 받는 장면을 극 초반에 더한 이유는 왜 일까? 그로 인해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 긴장감이 없어지고 평이한 순환적 구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에 비극성이 남는 것은 역시 원작의 고유한 힘에서 비롯한다. 사회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두 연인(한명구, 박호영 분)의 애절한 사랑만큼은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빛 아래, 숲 속에서 주인공들에게 다가올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고 지켜보는 코러스의 존재 또한 극에 고유한 음산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환기하기에 적합하다.

신부

그러나 열린 가능성이 있기에
한 공연 작품에 대한 관극 경험은 단순히 일회적인 공연 관람 그 자체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분명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켜본 다양한 공연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서 구축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지난 2001년 3월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 극단 모두 즐거운 사람들의 ‘피의 결혼’(연출 신리)은 로르카의 시극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전하는 시적인 공연이었다. 아마추어와 프로, 한국 배우와 외국 배우가 함께 등장하고 우리말과 외국어가 같이 사용된 그 공연에서 인물과 소품들은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연극성을 추구했다. 조명을 받은 모자 하나, 칼 한 자루만으로 그 자리에 없는 등장인물과 그의 행동동기를 전하기에 충분하다.

시적인 언어, 심장 박동과 같은 타악기의 연주, 배우의 존재와 소품, 노래가 환기하는 스페인의 독특한 지방색, 공연장 전체에 진한 향기를 뿜어내는 장미 다발, 전문 무용수의 섬세한 발레 동작, 두 연인의 도주를 표현하는 그림자 연극, 말을 타고 추격하는 장면을 표현하는 간략한 마임, 결투 장면을 양식화한 몸동작으로 형상화한 마임, 한 등장 인물의 배역을 여러 배우들이 연기하는 등 시청각적 요소가 풍성하되 넘치거나 지나침이 없다. 공연의 시청각적 요소들이 다시 읽히고 상상되어지면서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감각을 통해 어떻게 관념이 구현되는지를 이해하게 한 인상적인 공연이었다.

극단 자유의 ‘피의 결혼’이 외국 관객에게서 받은 호응은 단순히 서양식의 공연이 아닌 한국의 제의가 더한 독특한 색채에서 그들이 느꼈을 이국적 정취와, 함께 환기되는 로르카의 비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극단 자유가 오랜 시간 다듬어 온 ‘피의 결혼’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더욱 새롭게 공연될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2004년 한해 연극계를 주도해 온 연극 열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피의 결혼’에 객석의 호응이 더 해지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좋은 공연들을 기획해 준 연극 열전 사무국과 관계자 여러분의 노고에 깊이 감사 드린다.

2004년 12월 3일~31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제작 극단 자유 원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연출 김정옥 무대 미술 이병복 출연 박정자, 박웅, 권병길, 손봉숙, 안진환, 한명구, 박호영 외. 문의 연극열전 사무국 02-762-0010

송민숙 연극평론가


입력시간 : 2004-12-16 15:20


송민숙 연극평론가 ryu1501@korn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