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계통 : 9.11 테러에서 아부 그라이브까지시모어 M. 허시 지음세종연구원 발행1만5,000원

[출판] '테러와의 전쟁' 허구를 발가벗기다
지휘계통 : 9.11 테러에서 아부 그라이브까지
시모어 M. 허시 지음
세종연구원 발행
1만5,000원


2004년 5월 초, 전 세계 언론에 기사가 한 꼭지 타전됐다. 이라크 전쟁 포로들이 수감된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미군이 포로들에게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발가벗긴 이라크 포로들을 피라미드처럼 차곡차곡 쌓은 옆에서 만면에 미소를 띤 채 포즈를 취한 미군 병사들, 벌거벗은 포로의 성기를 가리키며 웃는 여군, 맹렬히 짖어대는 군견 앞에서 공포에 질려있는 포로의 모습 등 일련의 끔찍한 사진들이 기사와 함께 잇달아 공개됐다. 포로를 죽도록 구타하는 장면, 여성 포로를 강간하는 장면, 시간(屍姦) 장면, 남성 포로간의 성교나 강간 장면 등 공개조차 할 수 없는 사진들이 아직 더 있었다.

세계는 경악했다. 테러의 진원지, 잠재적 안보 위협 여지가 있는 ‘악의 축’을 제거하겠다며 자칭 정의의 사도로 나선 미국과 이라크 전쟁의 추잡한 이면이 세상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사욕이 벌인, 근거도 명분도 없는 뻔뻔스런 전쟁, 무고한 이라크 양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추악한 전쟁이라며 세계가 비난 여론을 쏟아 내던 때였다. 이 한편의 폭로 기사는 불길처럼 번지던 반전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이 기사의 작성자는 탐사 보도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시모어 M. 허시 기자. 예순 여덟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직 현장을 뛰어다니는 허시는 미 정부에게 눈엣가시다. 1968년 베트남 밀라이에서 미군이 자행한 500여명의 양민 학살 사건을 최초로 파헤친 것이 바로 그였다.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이 기사는 미국 내 반전 운동을 촉발시켰다. 이후에도 허시는 CIA의 캄보디아 폭격, 칠레의 아옌데를 축출하려는 CIA의 음모 등 굵직한 사건들을 탐사 보도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 왔다.

이번에도 그는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전쟁을 일으킨 백악관의 주장이 거짓임을 누구보다 먼저 밝혀냈다. 이 책에서 허시는 9.11 테러에서 이라크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포로 학대 사건까지, 수년에 걸쳐 미국이 벌여 온 ‘테러와의 전쟁’의 실상이 무엇인지 낱낱이 파헤쳤다. 허시의 지치지 않는 발품과 끈질긴 추적에 의해 미 정부가 은폐하거나 왜곡시킨 것들이 진실을 되찾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자 의무로 세계에 다가 왔다.

9.11 테러가 벌어지기 몇 달 전부터, 비행기를 이용한 테러 가능성과 혐의자들에 대한 FBI의 제보가 이미 백악관까지 올라 갔지만 부시 행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알 카에다 조직원들의 콸라룸푸르 회동 정보를 제공했지만 미국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이런 정보 기관의 무관심 때문에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던 9.11 테러가 초래됐다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책은 이 밖에도 사우디 왕가의 부패와 핵무기 거래, 파키스탄의 핵무기 안전에 대한 위협, 9.11 테러 용의자인 자카리아스 무사위 사건의 어수룩한 처리, 이스라엘 정보 요원들이 실시중인 쿠르드족 특공대 훈련, 알 카에다 조직원을 대상으로 한 인간 사냥, 아부 그라이브의 잔혹한 고문 사건 등 이라크 전쟁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며 각자의 파이를 잃지 않으려는 국가간 정보 전쟁과 냉혹한 현실 정치 세계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방대하고 진지한 보도 기록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고갱이는 9.11 테러부터 시작해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태가 미 정부와 군부의 리더십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아부 그라이브 사건 보도 후 럼즈펠트 미국방장관은 “몇몇 군인들의 잘못일 뿐”이라고 일축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문 사건의 배후에 지휘 계통의 최상부가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허시가 폭로한 ‘타구바 보고서’(아부 그라이브 진상 조사 보고서)는 럼즈펠트가 이라크 저항 세력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포로들에게 신체적 강압과 성적 모욕을 안기는 심문 방법을 승인한 사실을 담고 있었다. 특별접근프로그램(SAP)으로 불리는 이 심문 방법은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도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허시의 특종 이후에도 백악관은 사건 은폐와 왜곡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전쟁 규범이나 제네바 협약 등 국제 조약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인권에 대한 보수적이고 자의적인 법 해석을 일삼고 있는 미국. 그 지휘 계통의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럼즈펠트와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이들과 끈끈하게 연계되어 있는 부시 대통령이다. 이들은 도덕과 윤리를 버린 대신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그리고 이들이 벌이고 있는 전쟁珠箏絿?속에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하나 둘 늘어 가고 있음을 책은 증언한다.

이기연 출판전문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5-01-12 15:06


이기연 출판전문 자유기고가 popper@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