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꿩의바람꽃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너무 과한 곳도 있어 눈으로 고생한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못한 곳은 섭섭하기 이를 데 없다. 하얗게 덮인 눈을 보며 마음이라도 깨끗이 비우려고 했건만.

눈 덮힌 숲, 땅속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쏟아진 눈들은 길을 막기도 하고, 차를 미끌어 지게도 하고, 비닐하우스 지붕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자연에서 이 눈들은 고맙기만 하다. 더러는 나뭇가지를 부러지게도 하지만 이불을 덮듯이 나뭇가지들을 덮어 가장 무서운 찬바람의 피해를 막아 준다. 약한 가지들을 솎아 내어, 남은 가지들은 건강하게 해 주며, 그 가시 사이에 스며드는 햇살이 풀까지 비추도록 해 준다. 무엇보다도 이른 봄, 가장 마른 시기에 새싹을 틔워야 하는 식물들에게 살살 녹는 눈이야말로 더 없이 소중한 생명이다. 한 번에 숲을 날려 보낼 수도 있는 산불의 위험도 뚝 떨어진다.

높은 산에 쌓였던 눈이 녹고 나면, 아니 아직 잔설이 녹기도 전, 땅 위로 벌써 줄기를 올려 미처 잎도 피기 전 꽃을 피워내는 부지런한 봄꽃들이 있다. 복수초, 얼레지 같은 꽃들이 눈 속에 피어난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하지만 순백의 흰 꽃이 눈처럼 깨끗한 가자 가지 바람꽃들이 그 주인공이다. 꽃대가 하나씩 올라오는 홀아비바람꽃, 똑같이 둘이 올라오는 쌍둥이바람꽃, 옆에서 서로 서로 외치는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 꿩의바람꽃, 회리바람꽃, 변산바람꽃 …. 숱한 바람꽃 형제들이 대부분 봄에 피지만 정작 그냥 바람꽃은 한 여름에 피는 꽃도 재미나다.

꿩의바람꽃은 그 중에서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 볕이 드는 낙엽수 밑을 보면(물론 아직 나무 가지엔 잎이 트기 전이다)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래도 산이 제법 높이도 갖추고 좋은 숲의 구성을 갖춘 곳이 대부분이다.

꿩의바람꽃은 바람꽃속, 정확히는 아네모네(Anemone)속이다. 아네모네는 희랍어로 바람의 딸이란 뜻이니 우리말 이름이 바람꽃이란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람에도 살랑이듯 가녀리다. 좀 더 크게 집안을 보면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며 여러해살이 풀이다. 어떻게 저렇게 가녀린 줄기에 꽃이 달릴까 싶지만 그래도 언 땅을 뚫고 나와 씩씩하게 꽃이 핀다, 꽃잎과 꽃받침이 구분되지 않아 그냥 화피(花被)라고 부르는 잎이 8개에서 13장까지 여러 장 달려 곱다. 꽃 밑에 잎처럼 달리는 것은 잎이 아니라 총포라고 한다.

정작 잎은 꽃이 스러질 즈음 3갈래씩 2번 갈라졌으나 그 끝이 둥글 둥글하여 부드러운 느낌이다. 이 잎이 양분을 열심히 만들어 땅속줄기에 저장하고 다른 식물들이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 다투어 나올 즈음 지상에서 사라진다. 한방에서는 죽절향부(竹節香附)라는 생약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른 봄 숲에 피어나는 모습만으로도 꿩의바람꽃은 아름답다. 보통은 혼자 자라지 않고, 다른 여러 색깔의 하지만 키는 고만고만하게 한 뼘을 넘기지 않고 고산의 봄 꽃밭을 만든다. 그 봄이 빨리 왔으면 싶다.

입력시간 : 2005-01-2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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