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그림자와 판타지, 그리고 감동의 인간승리를 만나다

[시네마 타운] 황금연휴, 여유로운 극장가 산책
현대사의 그림자와 판타지,
그리고 감동의 인간승리를 만나다


<그때 그 사람들>
역사의 뒤안에 잠긴 그 사람들

“정치적 센세이셔널리즘과 제 커리어를 맞바꿀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습니다.” 1979년 10월 29일 궁정동 대통령 시해 사건에 기초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시사회가 열린 1월 24일, 이 영화를 만든 임상수 감독이 한 말이다. 영화는 궁정동에서 벌어진 하룻밤 동안의 사건을 극화한다. 박정희 대통령(송재호)이 소집한 궁정동 주연에 참가한 김 부장(백윤식)과 주 과장(한석규)등, 중앙정보부 요원 일단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 시해를 모의한다.

김부장이 울린 총성을 신호탄으로 기민하게 ‘거사’를 치른 이들은 군과 정부 관료들을 회유해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보수단체 회원이 시사회장에서 영화 상영 중지를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으며 국회의원들도 시사회에 참석했고, 감독에 대한 테러 위협이 가해지는 등 ‘그때 그 사람들’은 영화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더 화제를 모았다. 혹여 제작 중에 내용이 외부에 유출돼 촬영이 중단될 것은 저어한 제작사는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10.26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철저한 비밀에 부쳤다.

영화는 정공법이 아닌 우회적인 블랙 코미디의 전략을 택한다. 감독은 “영문도 모른 채 사건에 가담했다가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진혹곡”이라고 말했지만 영화는 실제 사건을 주도한 권력자들에 대해서 시종 일관 냉소와 조롱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실종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거사’나 ‘치밀한 계획에 의한 정치적인 암살’로 10ㆍ26을 묘사하기 보다는 권력 핵심부의 힘겨루기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풍긴다. 표현의 수위가 높을 것이라는 소문에 비해 묘사의 강도도 세지 않다. 사건 재현 차원에서 보자면 TV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방송된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박정희와 김재규 등 10ㆍ26의 주역들이 실명 거론되고 박정희를 비롯한 측근들이 가끔 일본말을 한다는 것, 총을 겨눈 김부장의 입에서 ‘다카키 마사오’라는 박정희의 일본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 영화의 말미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당시 모습이 나온다는 것 정도가 눈에 띈다.

역사적 사건에 연루돼 사라져 간 주변인들마저 코믹하게 묘사한 것도 다소 어리둥절하다. 영화가 공개된 후의 평가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10ㆍ26에 대해 알려진 사실 외에 크게 덧붙인 것도 거둬낸 것도 없는 ‘그 때 그 사람들’은 권력의 덧없음을 한껏 조롱한, 지극히 평범한 웰 메이드 상업 영화일 따름이다.



<공공의 적 2>
화이트 칼라 강철중의 공공의 적 소탕기

공중(公衆)의 삶을 위협하는 공공의 적이 다시 출현했다. 황금 만능 주의에 물든 패륜적 범죄자를 응징한 ‘공공의 적’에 이어 ‘공공의 적 2’에선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친 구제 불능의 사학재단 이사장이 심판대에 오른다. 2편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성공의 일등공신인 강철중 캐릭터의 변화다.

1편에서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무대포 강력반 형사였던 강철중은 ‘공공의 적 2’에서 이죽거리며 상대의 약을 올릴 줄도 아는 차가운 머리의 강력계 검사로 변신했다. 공공의 적 한상우(정준호)는 아버지가 죽은 뒤 학교 재단 이사장에 올라 골프 장학회를 설립하고 정치인(박근형)의 비호 아래 재계 유력 인사로 급부상한다. 한상우의 고교 동창생인 강철중(설경구)은 상우가 목적을 위해선 살인과 공갈, 협박 등 어떤 범죄도 가리지 않을 파렴치한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수사에 나선다.

‘공공의 적 2’의 검사 강철중에게도 형사 강철중의 향수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불의를 응징하려는 의협심과 범죄자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 단서가 포착되면 앞 뒤 가리지 않고 밀어 부치는 뚝심은 변치 않는 그의 미덕이다. ‘공공의 적 2’에서 강우석 감독은 더 큰 야심을 드러낸다.

‘공공의 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배금주의의 일단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보다 구조적인 사회악에 접근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강우석 감독은 2편에서 정치, 사회적인 악의 뿌리를 파고들려 한다. 정경 유착과 차떼기로 상징되는 정치인들의 비리, 가진 자는 영원히 자신들의 견고한 왕국을 내주려 하지 않는 부조리한 세습적 계급 구조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퍽 다양하다.

‘공공의 적 2’는 메시지와 드라마의 힘은 살아있지만 캐릭터의 매력과 에피소드의 신선함에선 전편을 능가하지 못 한다. 사실 ‘공공의 적’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던 ‘강철중’이라는 캐릭터와 배우 설경구의 에너지, 그리고 다양한 사건들을 엮어내는 드라마의 힘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만든 영화는 전부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했지만 ‘공공의 적 2’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한 강우석 감독은 2편에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낸 듯 보인다.

2시간 26분이라는 긴 상영 시간이 크게 지루하지 않을 만큼 공공의 적을 향한 강우석의 직설법에는 힘이 실려 있다. 정준호의 포악하고 야비한 공공의 적 연기도 괜찮고, 좌충우돌하는 블루 컬러 형사에서 화이트 컬러 검사로 변신한 강철중 역의 설경구 역시 기대에 값하는 호연을 보여 준다.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
아름다운 동화의 판타지를 깨다

레모니 스니켓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아동 문학계의 베스트셀러 작가 다니엘 핸들러의 판타지 소설 연작(국내에도 5권까지 출간돼 있다)을 영화화한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이하 ‘위험한 대결’)은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거의 모든 판타지 영화들의 집대성처럼 보인다.

깜찍한 소년 소녀 앞에 악당이 등장하고 그들은 위험에 빠지고, 매순간 기지로 위험을 모면한다는 줄거리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너무 익숙해진 도식이다. 그러나 ‘위험한 대결’의 원작과 영화가 누차 강조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아이들은 매번 용기와 지혜로 위험에서 벗어나고 악당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지만, 결코 해피 엔딩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위험은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위험한 대결’의 도입부 장면은 디즈니 풍의 동화를 마구 조롱했던 ‘슈렉’과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아름다운 인형극으로 시작되는 듯 보였던 영화는 곧바로 그 인형극이 가짜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영화의 화자인 레모니 스니켓은 이렇게 말한다. “해피 엔딩 영화를 보시러 오신 분들은 지금 즉시 이 극장을 떠나서 다른 영화를 보러 가십시오.” ‘위험한 대결’은 이렇듯 동화가 지닌 판타지를 여지 없이 무너뜨리면서 그 안에 가혹한 현실을 밀어넣는다.

아이들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세상에 믿을 사람은 거의 없다. 어른들은 무책임하고 아이들의 진심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 ‘위험한 대결’은 아이들에게 아름답기만 한 동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하는 드문 영화인 셈이다. ‘꼬마 유령 캐스퍼’의 연출을 맡았던 브래드 실버링은 ‘위험한 대결’에서 전작을 뛰어넘는 세련된 연출력을 선보인다. 팀 버튼(‘가위손’ ‘배트맨’ ‘빅 피쉬’)의 미술과 촬영 스태프들이 작업한 동화 삽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고딕 풍의 의상과 배경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며 세 명의 인물로 변신하는 악당 올라프 백작 역의 짐 캐리도 명불허전의 연기를 보여준다.

시니컬한 유머로 일관하는 ‘위험한 대결’은 뒤틀린 심정으로 쓴 동화 같은 이야기다. 팀 버튼 만큼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세 명의 주인공 아이들을 비롯한 온갖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꽉 차 있다. 천편일률적인 가족용 판타지 영화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위험한 대결’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지만 재미에 있어서는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 다소 어두운 내용이 찜찜하기는 하나 설 연휴 가족들이 함께 즐길만한 영화로도 큰 손색이 없다.



<말아톤>
소통불능의 장애를 극복한 휴먼스토리

‘말아톤’은 자폐아의 몸으로 마라톤 풀 코스를 완주한 배형진 군의 이야기에 바탕을 둔 영화다. 실화에서 소재를 취했다고는 하지만 ‘말아톤’은 불굴의 마라토너를 다룬 스포츠 영화도, 역경을 딛고 필생의 목표를 이루는 전형적인 인간 승리 드라마도 아니다.

자폐아 아들 초원(조승우)의 병증(?)을 호전시키기 위해 어머니 경숙(김미숙)은 마라톤을 시킨다. 달리기를 하면서 초원이의 상태가 좋아지자 경숙은 사회 봉사 활동 차 자폐아 학교에 온 전직 마라톤 선수 정욱(이기영)에게 초원의 마라톤 코치가 돼 줄 것을 부탁한다. 초원의 상태에 회의적이었던 정욱도 꾸밈 없이 밝은 초원에게 감화 받아 마음을 연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공감의 폭이 넓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로 갈등하는 이들에게는 세대의 벽을 극복한 훈훈한 가족 드라마로, 타자와의 관계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겐 진정한 소통의 휴먼 드라마로, 마음 속에 품은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에겐 자아 성장의 드라마로도 볼 수도 있다.

주인공 초원이 그림 일기에 내일 할 일을 ‘말아톤’이라고 적은 것에서 비롯된 영화의 제목은 실제 마라톤 경기를 의미하지만 초원이 마음 깊숙이 품고서 한 번도 발설하지 않았던 꿈, 즉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을 달리는 얼룩말처럼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는 유토피아의 이상향을 뜻한다. 약해진 인간의 마음을 파고 들어 억지 감동을 강요하는 감정 쥐어짜기 전략을 쓰지 않는 이 영화는 말과 행동의 표현이 서툰 자폐아 주인공을 통해 ‘꿈꾸며 사는 삶’의 소중함을 슬며시 음미하게 만든다.

스포츠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는 ‘달린다’는 행위에 담긴 쾌감, 즉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신으로 느끼고 머리가 아닌 몸을 통해 ‘살아 있다’는 느낌을 확인하는 경이로운 순간들을 체험하게 한다.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초원의 달리기 장면들이 이를 잘 표현한다. 이 같은 감동과 여운의 바탕에는 기본기가 충실한 신인 감독 정윤철이 1년 여에 걸쳐 다듬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기본기에 충실한 미더운 연출력, 충무로의 차세대 기대주인 조승우의 출중한 연기가 있다.

특히 정신 연령이 5세 수준에 머문 자폐아 초원을 더 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연기하는 조승우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자폐아는 어느 것 하나 동일화하기 쉽지 않은 낯설은 존재지만 탁월한 감각을 지닌 조승우는 엉뚱한 말, 액션, 제스처 속에 일반인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느낌을 담아내고 있다.



<클로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낯선 당신

‘졸업’으로 유명한 노장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신작 ‘클로저’는 애증의 사슬에 얽힌 네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1997년 영국 무대를 시작으로 연극계에서 화제를 모았던 동명의 연극을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명백히 연극의 이미지를 그대로 영화 속에 살려내려 노력했다. 오로지 네 명의 인물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탓에 캐릭터의 흡인력이 관건이었던 ‘클로저’는 특히 호화 출연진의 앙상블이 절묘하다. 주드 로, 나탈리 포트만, 클라이브 오웬, 줄리아 로버츠 등 누구 한 사람도 빠지지 않는 고른 열연을 보여 준다.

영화는 낯선 남녀의 극적인 만남으로 시작한다. 신문 부고 담당 기자인 댄(주드 로)과 스트립 댄서 알리스(나탈리 포트만)의 첫 만남은 운명적인 달콤한 로맨스를 예감하게 하지만, 로맨스의 완성 뒤에 찾아 오는 것은 불륜이다. 댄은 곧 사진 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와 사랑에 빠지지만 안나는 알리스의 존재 때문에 댄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

댄은 안나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으로 인터넷 채팅을 통해 안나 행세를 하며 피부과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웬)를 유혹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래리와 안나는 그 인연으로 결혼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두 커플의 관계를 갉아먹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클로저’는 일반인들이 꿈꾸는 사랑과 행복에 관한 상투형들을 끌어 들인 뒤, 조금씩 그것 파괴해 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클括?The Closer)’라는 제목은 매우 이율배반적인데,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오히려 낯설어지는 인물들의 역학 관계는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와 닮았다. 실제 섹스 장면은 하나도 없지만 이 영화는 온통 섹스에 관한, 욕망에 관한 대화들로 넘쳐 난다.

하여 포르노그라피는 여기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이미지다. 알리스가 일하는 스트립 바나, 저속한 음담패설이 난무하는 인터넷, 그리고 섹스에 집착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관계의 환상을 깨는 주요 매개로 작용한다. 그러나 섹스에 집착하는 남자들과 사랑에 목숨을 거는 여자들이라는 일반적인 통념 역시 마지막에서 철저하게 파괴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차의 틀을 깨는데 주력하지 않고 ‘클로저’는 나무랄 데 없는 위험한 바람둥이로 보여졌던 댄이 희화화되면서 친밀한 남녀 관계, 나아가서는 인간 관계 자체의 불모성에 대해 차갑게 냉소하는 이야기로 바뀐다. 친밀해 지기를 바라며 상대방에게 진실을 요구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자기가 원하는 진실만을 받아들이는 이기심 많은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 영화가 묘파하는 세상의 진실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2-02 13:10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