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적 영웅에 대한 추억벼락부자가 된 비행사 하워드 휴즈의 일대기, 미국의 초상 웅변

[시네마 타운] 마틴 스콜세지 감독 <에비에이터>
망상적 영웅에 대한 추억
벼락부자가 된 비행사 하워드 휴즈의 일대기, 미국의 초상 웅변


마틴 스콜세지(‘케이프 피어’ ‘카지노’ ‘갱스 오브 뉴욕’)의 신작 ‘에비에이터’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하워드 휴즈라는 비행사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자는 그저 비상의 꿈을 꾸는 평범한 비행사가 아니다.

열 아홉에 막대한 유산을 상속 받아 벼락 부자가 된 휴즈는 엄청난 재력을 앞세워 영화 제작자가 된다. 만인의 비웃음을 사면서 천문학적 제작비를 쏟아 부은 뒤 실제 비행기들이 잠자리 떼처럼 하늘을 누비는 영화 ‘지옥의 천사들’을 만든 그는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인 RKO를 사들였을 뿐 아니라, 굴지의 항공사인 팬암사와 쌍벽을 이룬 항공사 TWA를 소유한 자였다.

캐서린 헵번, 에바 가드너, 라나 터너, 베티 데이비스 등 수많은 헐리우드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린 바람둥이였으며 꼬장꼬장한 결벽증 환자였고 자신이 설계한 비행기를 몰고 세계 일주 기록을 세운 기인이었다. 휴즈의 웅변적 일대기는 한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항상 ‘최고와 최강’을 꿈꾸는 미국의 초상과 겹쳐진다.

판타지 왕국의 군주
‘에비에이터’는 휴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영화 제작자로 성공한 후 항공사 TWA를 만들고 천신만고 끝에 일생일대의 꿈이었던 메머드 비행기(헤라클레스)를 띄우기까지의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쫓아 간다. 스콜세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거대한 하늘을 나는 비행기들의 군무를 바라보며 황홀경에 젖은 휴즈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서 비행의 쾌감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숨막히는 연기로 되살아 난 휴즈는 비행광이자 과대 망상증 환자였다. 아무런 보호 장비도 갖추지 않고 서커스를 하듯 사방으로 활강을 하다 사선을 넘나드는 휴즈는 신이라도 된 듯 환호작약하며 소리를 질러댄다. 휴즈에게 비행기는 지상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과 같다. 영화는 휴즈의 집착 가운데서도 그의 생애를 지배했던, 위험과 쾌감을 동시에 구현한 ‘비행사로서의 삶’에 집중한다.

미국 최고의 재력가이자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매몰찬 야심 때문에 휴즈의 삶에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았다. 스캔들 메이커 휴즈의 거대한 판타지 왕국은 그가 지닌 자본력 덕분에 결코 퇴락하지 않는 에덴 동산과도 같았다. 스콜세지는 평생을 지상에 발붙이지 않고 판타지만을 쫓아갔던 휴즈에게서 미국적 영웅의 모습을 찾는다.

일상 생활에서는 과도한 결벽증에 시달리는 나약한 인간이었던 휴즈가 유일하게 완벽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순간은 비행의 순간 뿐이었다. 비행기를 직접 설계하고 조종할 정도로 비행기에 조예가 깊었던 휴즈는 자신의 삶에서 최고의 순간들을 비행기 안에서 만끽했다.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낭만적이고 편안한 이미지는 휴즈가 캐서린 헵번과 함께 단 둘이 야간 비행을 하며 할리우드 상공을 누비는 장면이다. 두 번의 추락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 휴즈는 실제로 살아있는 동안 내내 결코 지상에 착륙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추락의 공포를 이기다
비행의 쾌감 못지않게 휴즈의 무의식을 사로잡고 있었던 건 추락의 공포였다. 영화의 첫 장면은 전염병의 공포에 대해 충고하며 어린 휴즈의 몸을 씻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염병으로 숨진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휴즈의 결벽증때문에 그는 자신이 만든 유리의 성 바깥으로 나가지 못 하는 인간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휴즈의 모습에서 스釜셉測?거대한 망상과 집착의 흔적을 발견한다. 영화는 휴즈가 머무는 공간을 유형화해서 보여준다. 화려한 사교 클럽과 어두운 시사실, 비행기 안, 화장실, 식탁은 모순덩低?괴물 휴즈의 이미지를 구현한 공간들이다. 미남 백만장자에 모험을 즐기는 발명가로서의 이미지와, 10분에 한 번씩 손을 씻거나 직원들이 서류를 가져올 때 비닐 장갑을 끼도록 명령하는 등 결벽증 환자로서의 이미지는 서로 충돌한다.

휴즈의 꿈과 사랑, 절망과 재기를 흥미진진하게 쫓아갈 수 있는 건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카지노’ ‘올리버 스톤의 킬러’ ‘킬 빌’) 의 풍성한 화면 덕분이다. 다양한 컬러를 통해 망상적 영웅의 세계를 시각화하는 리처드슨의 카메라는 고전 영화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듯 화려하고 분열증적이기까지 하다. 가장 인상적인 두 번의 추락 장면에서 스콜세지는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지붕, 붉은 사탕무우 등을 동원해 휴즈의 파국을 예감하게 한다. 휴즈의 피해 의식과 대인 기피증은 그가 대중들 앞에 나설 때마다 칼날로 베어 버릴 듯이 사정없이 얼굴을 강타하는 카메라 플래쉬를 통해 선명하게 암시된다.

‘에비에이터’에서 우리가 지켜보는 것은 타고난 환자이자 몽상가인 휴즈의 모습이다. 이러한 선천적인 기질 탓일까, 스콜세지가 그려낸 휴즈는 감탄을 자아낼지언정 이해하고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캐릭터가 되지는 못한다. ‘에비에이터’는 흠잡을 데가 거의 없는 전기 영화다. 전기 영화라는 특성 때문에 3시간에 달하는 장광설이 좀 지루하긴 하지만 하워드 휴즈라는 흥미로운 인물의 생애와 노련한 감독 스콜세지의 관록, 골든글로브에 이어 아카데미까지 노릴만한 디카프리오의 연기,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유려한 영상과 음악까지, 지루함을 상쇄할만한 요소들은 많다. 허망한 경주를 벌이다가 초라한 말년을 맞는 스콜세지 영화의 인물들과 비교해보면 결말에서 휴즈의 상태는 괜찮은 편이다.

영화는 사업가로서 비행사로서 휴즈의 삶의 정점에 이른 시점에 끝나지만 말미에 스콜세지는 휴즈가 서서히 파멸해갈 것임을 암시한다. 의기양양했던 백만장자의 외로운 말년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는 실존 인물의 사실적 무게감에 눌려 밋밋하게 그의 삶을 재현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신화적 인물의 영광만을 추억하게 하지 않고 그 이면에 서린 고독과 망집을 동시에 조망한다. ‘에비에이터’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피해 의식에 관한 이야기며 미국적 영웅 신화의 허약함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2-23 14:55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