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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추상미의 <프루프>
한 인간의 수학적 존재증명
정심분열증에 시달렸던 천재수학자와 그의 딸에 대한 이야기
2000년 초연 이후 20년 만에 브로드웨이 최장기 연극 공연 기록






미국 극작가 데이비드 어번의 ‘프루프’는 2000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이후 이듬해 토니 어워드 최우수 연극상, 여우 주연상, 최우수 감독상, 퓰리처상 등을 수상했다. 20년 만의 브로드웨이 최장기 연극 공연(918회)이라는 기록은 이 극이 대중적 인기를 누렸음을 증명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 세실극장에서 추상미(장영남과 더블), 전석환, 추귀정, 장현성 배역으로 공연되었고, 2005년 현재 남자 배역을 최용민과 최광일로 교체하여 동숭홀에서 앙코르 공연 중이다.

게임 이론으로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천재 수학자 존 내쉬 박사를 그린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보셨다면 이 공연이 좀 더 친숙하게 여겨질 것이다. ‘프루프’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렸던 천재 수학자와 그의 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수학은 또 하나의 세계이다. 수학의 세계는 완벽하고, 수학적 증명은 우아하며 음악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극을 쓰면서 두 개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하나는 사이가 멀어진 자매들이고 다른 하나는 괴로워하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다. 일견 무관해 보이는 이 두 가지 생각은 극에서 어떤 연결 고리를 찾을까? ‘프루프’란 구체적으로 수학적 증명을 말하는데 공연을 통하여 그것이 새롭게 포괄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천재성, 그리고 광기
수학자 로버트(최용민 분)는 젊은 시절 수학 분야에서 천재적인 업적을 남기지만 정신 분열증에 시달리게 된다. 딸 캐서린은 학업을 포기하고 여러 해 동안 그를 간호한다. 언니 클레어(추귀정 분)가 뉴욕에서 자신의 경력을 이어 간 반면 캐서린은 삶의 대부분을 포기한 채 병든 아버지를 돌본 것이다. 아버지의 사후 그녀가 무엇보다 우려하는 것은 아버지의 수학적 능력뿐만이 아니라 광기조차도 혹시 자신이 이어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가능성이다. 가족이란 서로 닮게 마련이지만 때로 그것은 축복이 아닐 수도 있다.

극은 2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극의 시간은 로버트의 장례식을 전후로 한 약 열흘 남짓, 극의 공간은 시카고 캐서린의 집 뒤 베란다로 고정된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 극의 묘미는 추리 소설처럼 잘 짜여진 플롯에 의해 유지되는 극적 긴장감에 있다. 2시간 남짓 공연시간 동안 관객은 한 순간도 흥미의 끈을 놓지 않고 연기자들의 연기와 사건의 진행을 지켜보게 된다. 관심의 초점은 극의 제목이 시사하듯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된 수학적 증명을 쓴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에 맞춰진다.

캐서린의 존재적 불안, 대립, 열정
극이 시작되면 캐서린이 뒤 베란다 의자에 앉아서 불안한 듯 손을 떨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녀는 아버지와 일상적 대화를 나누는데 이들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내일이 일주일 전 심장마비로 사망한 부친의 장례식 날이라는 사실이다. 이 같은 대화는 단순히 그녀가 잠시 꿈을 꾸거나 상상한 내용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부친이 겪던 신경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나쁜 징조’가 될 수도 있다.

장례식 차 뉴욕에서 돌아 온 클레어는 아버지의 ‘재능과 불안정한 기질’을 그대로 이어 받은 동생 캐서린을 돌보고자 뉴욕으로 이주하라고 권한다. 이들 자매간의 감정이 대화를 통해 날카롭게 대립한다. 아버지 로버트는 1막 캐서린의 환상 속에서, 2막에서는 4년 전 가을과 겨울 장면에서 등장한다. ÷뼈?그가 약 9개월 동안 잠시 정상 상태를 회복하여 학생들의 논문을 지도하던 시점隔? 겨울은 정신병이 다시 심해진 시기를 보여 준다. 극에 삽입된 이러한 장면들은 과연 로버트가 제대로 된 수학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가에 대한 두 가지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는 잠시 정상을 회복하기는 하지만 한 겨울, 추위에 떨면서 그가 쓰던 글은 광인의 그것에 불과하다. 더불어 캐서린이 아버지의 지병으로 인해 제대로 학업을 이어 가기 어려웠던 상황을 제시한다.

부친의 제자인 핼(최광일 분)은 103권에 달하는 스승의 메모 노트를 정리하면서 뭔가 수학 학계에 큰 업적이 될 ‘증명’을 찾고자 한다. 캐서린은 그것이 무익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가 원하는 작업을 허락한다. 이들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으며 호감을 느끼던 터이다. 부친의 장례식을 마치고 캐서린과 핼은 서로에게 급격하지만 솔직한 사랑을 표현한다.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 캐서린은 그에 대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노트가 담긴 서랍 열쇠를 건넨다. 핼은 그가 발견한 노트에 쓰인 소수에 대한 “엄청난” 수학적 증명을 쓴 사람이 캐서린임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캐서린은 그의 불신에 크게 실망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아버지를 돌보느라 변변히 강의도 듣지 못한 그녀가 스스로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혼자서 이어 왔을 연구의 치열함은 눈물겹다. 그 연구가 세상에 드러나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관심이 필요하다. 핼은 증명에 사용된 새로운 방법들로 인해 그 저자가 결국 그녀라는 확신에 이른다. 핼은 시카고를 떠나려던 캐서린에게 그와 함께 머물 것을 당부한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이들 간의 호감은 두 사람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주는 계기가 된다. 말하자면 그 ‘증명’은 캐서린이 고통스럽고 불안정한 삶에서 애써, 치열하게 캐어낸 삶의 가장 우아한 정수(에센스)이다.

추상미는 손을 대면 그대로 부서질 것 같은, 존재론적 불안을 겪는 캐서린을 표정과 신체동작을 통해 섬세하게 표현한다. 캐서린은 무대에 거의 상존하는 만큼 그 비중이 크다. 공연 ‘프루프’는 그녀의 연기가 부각되는 자리이다. 그녀는 연기를 통해 캐서린의 삶에 대한 불안과 수학에 대한 엄청난 열정, 언니와의 대립과 핼에 대한 관심을 고스란히 그려낸다.

‘프루프’의 연출자 김광보는 연기자들이 변신을 하듯 고정된 이미지를 거부하며 다양한 주제의 작업을 시도해 왔다. 이번 공연에서는 자의적인 해석보다는 가능한 한 대본의 여백을 충실하게 메우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관객은 극을 지켜보면서 과연 스스로의 존재를 삶 속에서 무엇으로 증명해나갈 것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예전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빨간 피터의 고백’을 연기하던 고 추송웅이 그녀와 이 극을 함께 공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 때 2005년 2월 4일~3월 13일 * 곳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 작 데이비드 어번 * 연출 김광보 * 출연 추상미, 최용민, 추귀정, 최광일 * 공연문의 악어컴퍼니 02-764-8760




송민숙 연극평론가 ryu1501@kornet.net


입력시간 : 2005-02-2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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