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구원한 음악 영화를 구원한 연기현대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 남긴 거장의 전기영화

[시네마 타운] 헥포드 감독 <레이>
영혼을 구원한 음악 영화를 구원한 연기
현대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 남긴 거장의 전기영화


영혼을 구원한 음악, 영화를 구원한 연기 2월 13일 LA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린 제 47회 그래미 시상식의 주인공은 노라 존스, 알리시아 키스, 존 메이어, 어셔 등 쟁쟁한 신세대 뮤지션들이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음악인들의 잔치는 2004년 6월 10일 간질환 합병증으로 세상을 등진 전설적 소울 뮤지션 레이 찰스에게 헌정되었다. 유작이 된 ‘Genius Loves Company’로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레코드’ 등 8개 부문을 석권한 것도 이슈였지만 노장의 퇴장을 아쉬워 하는 후배 음악인들의 경의의 무대가 볼 만 했다.

영화 ‘레이’에서 레이 찰스 역을 맡은 영화 배우 제이미 폭스(‘알리’ ‘콜래트럴’)와 레이 찰스의 친우(親友)이자 프로듀서인 퀸시 존스, 그리고 알리시아 키스가 협연한 레이 찰스 헌정 무대는 퍽이나 감동적이었다. 개그와 연기 뿐 아니라 음악에도 정통한 다재다능한 만능 엔터테이너인 폭스는 영화에서 피아노 실력을 다시 한 번 선보이면서 레이 찰스의 넘버원 히트곡 ‘Georgia On My Mind’를 열창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레이 찰스가 현대 대중 음악계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전기 영화의 표준 답안
‘레이’는 일곱 살에 시력을 잃은 이래 시각 장애와 인종 차별, 마약 중독을 이겨내고 미국 대중 음악계의 거성으로 자리매김한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전기 영화다. 레이 찰스는 최근 할리우드가 열을 올리고 있는 신화적 전기 영화의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심신의 장애를 딛고 뮤지션으로 성공한 드라마틱한 삶과 실존 인물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뛰어난 배우의 열정적인 연기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다.

‘라밤바’의 제작자로 참여해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과시한 바 있었던 테일러 헥포드(‘사관과 신사’, ‘데블스 애드버킷’, ‘프루프 오브 라이프’)감독은 15년 전 레이 찰스를 찾아가 “당신의 인생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청했다. 헥포드에게 영감을 준 것은 레이 찰스의 대표작 ‘ I’ve Got A Woman’이었다. 이 불후의 명곡에 마음을 빼앗긴 헥포드의 제의를 받은 레이는 영화 제작 과정 전반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고 영화화를 허락했다.

영화는 레이 찰스(제이미 폭스)가 우여곡절 끝에 미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대중 가수로 자리 잡아 가는 과정을 따라 잡는다. 플래시백으로 중간 중간 삽입되는 유년 시절을 제외하면, 영화는 컨츄리 뮤지션으로 음악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대중가수로 거칠 것 없는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마약 중독으로 질곡의 삶을 살았던 1960년대 중반까지에 집중돼 있다.

영화 속에서 레이는 천상의 목소리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모창 가수로 입에 풀칠을 했던 초창기를 지나 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로큰롤, 재즈, 블루스, 가스펠 등 장르의 경계를 희롱하며 경이적인 창작력을 보여준다. ‘레이’는 주변 사람들의 편견과 몰이해(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조차 음악에만 몰두하는 레이를 비난했다) 속에서도 음악과 연결된 삶에서만 자유를 누렸던 한 예술가의 본질에 가까이 가려 한다.

헥포드 감독은 레이의 천재적 음악성과 맹렬한 예술가 근성에 경의를 표하지만 그의 생애를 덮어 놓고 미화하지만은 않는다. 레이는 위대한 뮤지션인 동시에 문제적 인간으로 그려진다. 동생이 빨래통에 빠져 죽은 것을 본 후 눈이 점점 멀게 됐던 일, 암흑?공포와 두려움을 잊기 위해 마약에 중독됐던 일탈적인 삶, 결핍을 채우기 위해 생긴 바람둥이 기질 등 ‘레이’‘는 한 인물의 다층적 삶을 입체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애쓴다.

음악과 연기의 절묘한 앙상블
물론, 전기 영화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레이의 다양한 삶을 담기 위해 늘어지는 상영 시간과 연대기적 기록에서 벗어나지 못한 구성은 일견 진부해 보이기도 한다. 불의의 사고로 동생을 잃은 유년기의 외상 때문에 환각에 시달리는 레이의 내면적 갈등도 피상적으로 묘사돼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전개가 지루해지려 할 때마다 적절하게 터지는 음악 덕분에 관대한 마음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레이’는 주옥 같은 명곡들의 퍼레이드 덕분에 ‘귀’가 호강하는 영화이다.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컨츄리 음악으로 시작해 흑인 영가, 블루스와 소울로 진화해 가는 음악적 행로를 따라가는 구성은 예술가로서 레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레이 찰스의 전성기 대표곡들인 ‘What'd I Say’, ‘I've Got A Woman’, ‘I Can't Stop Loving You’ 등의 명곡이 창조되는 과정도 흥미를 자아낸다.

성공적인 전기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최대의 공로는 레이 찰스를 연기한 흑인 배우 제이미 폭스에게 돌아 가야 할 것이다. 이미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아카데미 시상식의 강력한 남우주연상 후보로 점쳐지고 있는 폭스의 연기는 단순한 흉내 이상이다. 레이의 생애를 연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고통과 절망, 환희를 구현한 듯 보이는 폭스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경탄이 나온다.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는 폭스는 레이의 명곡들을 직접 연주할 뿐 아니라 라이브 공연을 보는 듯한 완벽한 립싱크, 표정, 제스쳐, 억양 등 뼛속까지 레이 찰스가 된 명연기를 보여 준다.

폭스의 신들린 연기와 40여 곡 가까운 레이의 주옥편들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이 영화, ‘레이’를 관람하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러나 폭스는 “레이는 나 자신을 알게 해주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없다는 것도 알게 해주었다. 난 레이의 영원한 학생”이라고 자신을 낮출 뿐이다. 비록 레이는 영화가 개봉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 영화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에게 무덤에서 부활한 영혼을 보는 듯한 감동에 젖게 한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3-02 17:37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