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한자에 스민 고대인의 사유읽기
漢字 백가지 이야기
시라카와 시즈카 지음ㆍ심경호 옮김. 황소자리 발행 23,000원


최근 한자(漢字)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라고 할만하다. 올해 한자 등급 시험에 응시한 학생이 100만 명을 넘고 한자 관련 책자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는가 하면 대기업들도 한자 구사 능력을 채용의 중요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하지만 한자가 지닌 본래 의미(상징)에 대해선 이해가 소홀하거나 잘못 알려진 경우가 적지 않다. ‘한자 백가지 이야기’는 이처럼 한자 열풍에 가려진 한자에 대한 단편적이고 왜곡된 부분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일본의 최고 한학자로 꼽히는 저자(96)는 한자의 원형인 갑골문ㆍ금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고대의 여러가지 의식과 절차, 제사ㆍ주술도구가 한자의 기본자가 되고 이들이 합쳐져 복잡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한자를 제의(祭儀)를 담은 고도의 상징적 사유체계라고 정의한다. 예컨대 명(名)은‘저녁(夕)에는 입(口)으로 이름을 말한다’로 풀이해 온 글자이지만 夕은 제사상의 고기(肉)로, 口는 입이 아닌 축문을 담는 그릇으로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이름을 부여하고 조상 신령에게 보고하는 통과의례를 상징한 글자라는 것이다.

‘집(家) 속에 아이(子)가 있다’로 풀이되는 자(字) 역시 윗부분은 의례가 벌어지는 조상의 사당을 나타내는 것으로, 아기를 선조의 사당에 처음 보이는 의례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난해 정치권을 요동치게 했던 ‘탄핵(彈劾) 정국’에서 탄핵의 본래 뜻은 사악한 기운을 떨쳐버리는 주술적 행위에서 기원한다. 彈은 잡스런 기운을 쫓기 위해 활시위를 잡아 당겨 소리를 내는 명현(鳴弦) 의례를 뜻한다. 劾은 자신을 저주하는 데 사용된 짐승을 구타해 악령으로부터 벗어나는 주술이다.

한자의 이러한 주술적 상징체계는 600여 년의 기간을 계승해 오다 춘추전국시대(BC 770~221)를 맞으면서 실용 목적에 따라 분화됐다. 과거 신성한 제사에만 사용되던 한자는 조세 등 실용 목적에 쓰이면서 ‘원시성’이 퇴화됐고 한자의 간략화는 그러한 경향을 가속화했다.

세계적 언어학자 소쉬르 이래 언어학이 언어를 뜻과 기호로 분리하는 추세가 확장된 것도 한자의 본체를 압박했다. 저자는 한자의 위기를 맞아 한자가 지닌 ‘원시성’을 되살릴 것을 강조한다. 한자가 고대인의 제의를 영상으로 담은 만큼 ‘영상성’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저자가 한ㆍ중ㆍ일의 교육이 암기에 치중, 한자라는 탁월한 문명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는 것은 그러한 맥락이다.

책은 100개 항목으로 나뉘어 해박한 기술이 촘촘하게 배어 있는데다 주석까지 상세하게 곁들여져 어렵다는 한자와 친근해질 수 있다. 한자의 원형질을 통해 고대인의 사유체계와 동양철학의 뼈대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5-25 19:44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