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으로 포장한 익숙한 풍경들원숙미 돋보이는 인간탐구, "무의미한 일상나열""인간행위의 본질"평가 극과 극

[시네마 타운] 홍상수 감독 <극장전>
낯섦으로 포장한 익숙한 풍경들
원숙미 돋보이는 인간탐구, "무의미한 일상나열"
"인간행위의 본질"평가 극과 극


홍상수의 영화는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인기가 높다. 얼마 전 막을 내린 58회 칸 영화제에서 그의 신작 <극장전>은 수상권에 들지는 못했지만 경쟁 부문 초청작이 모두 마감된 후, 집행위원장 직권으로 뒤늦게 합류하는 '이례적인 환대'를 받았다.

프랑스 영화사 MK2가 <극장전>의 제작비 일부를 댔고 앞으로도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로 했을 만큼 프랑스에서 홍상수의 존재감은 크다. 프랑스에서의 쏟아지는 관심에 비해 국내에서의 최근 대접은 사뭇 다르다.

전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데뷔 이후 줄곧 같은 이야기와 스타일을 반복하는 '매너리즘'으로 비판을 받았다. 무엇을 말하려는 지가 모호하고 자기 만의 세계에 갇혀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했다는 부정적 평가 일색이었다. <극장전>은 다시 한 번 홍상수의 영화 세계에 대한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 영화는 '무의미한 일상의 나열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장난 같은 이야기'라는 비난과 '밝은 눈으로 인간 행위의 본질을 꿰뚫어 온 홍상수식 이야기가 정점에 달했다'는 찬사를 동시에 받고 있다.

극장 앞에서 들려주는 극장 이야기
제목 '극장전'은 중의적 의미다. 극장 앞(前)이라는 뜻과 극장에 대한 이야기(傳) 라는 두 가지 뜻. 영화의 내용도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품고 있다. 영화는 1, 2부로 구성돼 있다. 영화 속 주인공 상원(이기우)이 중학교 시절 첫사랑 영실(엄지원)을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내용이 1부, 영화감독 지망생 김동수(김상경)이 이 영화를 보고 나와 영화 속 주인공인 여배우 최영실(엄지원)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하루의 일과를 따라가는 내용이 2부다.

1부와 2부는 서로 반향하는 이야기다. 영화 속 주인공 상원이 과거 여자 친구를 만나 하루를 보냈듯이 동수도 여배우 영실과 하루를 보낸다. <극장전>은 어찌 보면 특별한 사건 하나 일어나지 않는 두 개의 이야기가 대칭 구조로 붙어있다. 영화 속에서는 상원과 영실이 자발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영화 밖에서는 동수가 일방적으로 영실의 뒤를 쫓아다닌다.

술을 마시고 여관에 가고 섹스를 하고 병원에서 헤어지는 것까지 1, 2부는 비슷한 행로를 겪는 인물들을 보여주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처럼 홍상수 영화는 익히 보아왔던 것, 눈에 익숙한 풍경을 낯설게 보도록 만든다. 이 영화 역시 남산타워, 종로, 시네코아 극장, 낙원동 악기점 등 익숙한 서울의 풍경을 보여주지만 그 공간들은 늘 그곳에 있던 모습이 아닌 듯 생경해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의 모습을 살짝 비트는 것은 늘 있던 장소, 늘 보던 사람, 늘 보던 일상의 행위들을 곱씹게 만드는 홍상수 만의 독특한 화술이다. <극장전>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매번 영화를 만들때마다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홍상수의 배우에 대한 감식안이다.

칸 영화제에 참가한 홍상수(왼쪽 두번째) 감독이 김상경(왼쪽 끝), 엄지원 등 배우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

<생활의 발견>에서 한 번 호흡을 맞춘 바 있는 김상경의 능글맞은 연기는 경지에 달했다. <클래식>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의 청춘 영화에서 그저 그런 연기를 보여준 신인 이기우, <똥개> <주홍글씨>에서 큰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던 엄지원에게서까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 뿜어져 나온다.

전작들에서의 연기가 재능의 낭비로 느껴질만큼 이들은 날 것 그대로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배우의 특성을 간파하고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끌어내는 연출력은 온전히 홍상수의 힘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영화로 인간을 말하다
<극장전>은 극장을 소재로 했지만 '영화'보다 '인간'에 대한 영화에 가깝다.

홍상수는 인간을 논리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동물처럼 묘사한다. 만화경 같은 세상에서 자기애와 욕망에 들떠 있는 인간의 욕망을 뼛 속까지 들춰내는 그의 영화는 한편으로 부정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이유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인물들의 돌출 행동이나 선문답 같은 대화, 기승전결의 드라마 구조를 따르지 않는 갑작스러운 마무리 등 <극장전>은 홍상수 영화의 특징을 되풀이한다.

얼핏 보면 홍상수의 영화는 싱겁고 맥락이 없는 뜬금 없는 에피소드들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처럼 허술하다. 하지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서 우리들이 사는 모습, 구차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모순이 낱낱이 발가벗겨진다. <극장전>은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의를 가장하지만 결국 욕망의 볼모일 수밖에 없는 수컷들의 가련한 모습을 훔쳐보도록 만든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폭로하는 것은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목적에서는 아니다.

홍상수는 이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참 모습이라고,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그렇게 부끄러워할 일만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한심해 보이는 영화 속 인물들은 다른 한 편으로는 귀엽다. 그런 의미에서 <극장전>은 <생활의 발견>과 더불어 홍상수의 영화 중 가장 유머러스하며 담백한 영화다.

홍상수는 이제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비극 보다 희극의 힘에 대해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의 영화가 인간의 욕망을 바닥까지 까발리는 집요함과 여성 비하적인 묘사(특히 전작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때문에 종종 공중의 비난을 샀던 것을 상기한다면 의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장난스럽고 악취미적인 홍상수의 조롱에 기꺼이 무장해제를 당하고 싶은 심정이 드는 것은 그것이 비난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성찰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약한 곳을 비수로 콕콕 찌르는 듯한 그의 냉소를 인정할 수 있게 됐을 만큼 이제 관객들은 홍상수식 화법에 익숙해졌다. <극장전>이 한 없이 가벼운 한 편의 희극처럼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6-01 19:09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