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본능…그들은 달리고 싶다인라인 스케이트에 꿈과 열정, 쾌감을 싣고 질주하는 아이들의 삶

[시네마 타운] 정재은 감독<태풍태양>
청춘본능…그들은 달리고 싶다
인라인 스케이트에 꿈과 열정, 쾌감을 싣고 질주하는 아이들의 삶


‘태풍태양’의 초반부에는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만큼 현란한 화면들이 지나간다.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거대 도시 서울을 놀이터 삼아 스피드에 몸을 의탁한 아이들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맵시 있는 영상에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인라인에 젊음을 저당 잡힌 아이들이 꿈과 열정의 대가로 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쫓아간다. ‘맨발의 청춘’이나 ‘바보들의 행진’ ‘고래사냥’ ‘비트’ ‘태양은 없다’류의 청춘영화가 당대 젊은이들의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반영했다면, ‘태풍태양’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청춘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다.

땀내 나는 스케이팅 장면의 쾌감
할 일은 많은 것 같지만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뚜렷치 않은 부박한 청춘의 한 시절, ‘태풍태양’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사랑과 꿈, 성장의 이야기다. 학업에 취미가 별로 없는 소극적인 고교생 소요(천정명)는 공원 한구석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다가 인라인 전문 그룹의 퍼포먼스를 보고 금방 마음을 빼앗긴다.

최고 테크니션으로 화려한 묘기를 선보이는 모기(김강우), 모기의 여자 친구 한주(조이진), 그룹의 리더 격인 갑바(이천희) 등과 어울려 지내게 된 소요는 부단히 스케이트를 연습한다. 인라인을 통해 자신의 열정을 발산하던 이들 일행은 그룹을 이끄는 양대 산맥인 모기와 갑바가 가치관 차이로 대립하면서 뿔뿔이 흩어진다.

‘태풍태양’은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의 매력을 직접 몸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카메라는 테헤란로의 마천루나 한 뼘도 안 되는 계단 난간, 활처럼 굽은 철근 구조물 등을 넘나드는 스케이터의 눈이 돼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인라인의 활기를 실감나게 포착해낸다.

현란한 스케이팅 장면과 더불어 돋보이는 것은 '서울의 재발견'이라 할 만큼 서울 곳곳의 숨어있는 공간들의 갖가지 모습이다. 정재은 감독은 갈수록 기능적으로 구획화, 파편화해 가는 서울을 아이들의 놀이터로 탈바꿈 시킨다. 기성 세대의 언어나 행동과는 완전히 다른 언어와 놀이 문화를 지닌 젊은이들만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아이들의 패션이나 헤어 스타일 뿐 아니라 비주얼 전략 자체를 다르게 짰다.

인라인은 이러한 비주얼 전략을 보증하는 수단이다. 영화 속에는 인라인에 취미가 없는 사람들조차 빠져들 만큼 눈이 휘둥그레지는 장면들이 수두룩하다. 빌딩과 빌딩 사이를 질주하는 스피디한 레이싱, 공간과 몸이 하나된 듯한 아크로바트적인 액션, 보는 이의 피를 거꾸로 치솟게 만들 것 같은 현란한 기예 등이 짜릿한 흥분을 자아낸다.

‘태풍태양’의 역동적 화면은 스포츠나 춤 등 몸의 액션을 다룬 기존의 한국 영화들이 일찍이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프로페셔널 인라인 스케이터들을 테크니컬 트레이너로 기용해 액션의 사실감을 살려낸 제작진의 노력이 결실을 본 셈이다. 고난도 액션은 전문 대역 배우들의 몫이지만, 스케이트를 배워가며 액션 연출에 생기를 더한 배우들의 구슬땀이 화면에서 배어나온다.

전형성이라는 올가미
정재은 감독은 앞 뒤 재지 않고 자기 세계에 심취한 아이들의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색안경을 낀 외부인들은 '자포자기한 실패자들의 도피'라고 부를 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세상의 이해 따위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즐기자’가 그들의 유일한 모토다.

하지만 그들이 안전하게 자신의 꿈?즐길 공간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가파른 계단 난간이나 어두컴컴한 지하도, 흉물스러운 도시의 건축물에 몸을 맡겨야 하는 위태로운 처지인 것이다. 빈한한 청춘의 삶일망정 미래에 대한 꿈으로 돈독했던 그들의 관계도 어느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바퀴 몇 개에 의지해 난간 위를 위태롭게 미끄러져 가는 그들은 언젠가 각자의 길을 가야 하는 예정된 운명에 의해 성장통을 겪는다.

정재은은 스무 살 소녀들의 꿈과 이상을 그들의 눈높이로 응시한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2001)로 주목 받은 기대주다. 젊은이들의 음영이 깃든 삶을 다루는 것이 정재은의 장기다. 하지만 동시대 젊은이들의 삶을 소재로 한 청춘영화는 '전형'에 빠지기 쉬운 장르다.

세월이 흘러도 10대 아이들의 고민과 방황, 그리고 성장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이 같은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만남-방황-이별-성장이라는 청춘영화의 전범을 그대로 따라가는 구성,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 분명한 뻣뻣한 대사, 제어 되지 않은 연기가 눈엣가시다.

특히 ‘실미도’ ‘꽃피는 봄이 오면’에 출연해 그나마 경력을 쌓은 김강우를 제외하고 완전 신인들로 구성된 배우들의 연기는 말 그대로 아마추어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둘 곳 없는 아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태풍태양’의 가장 큰 미덕이다. 정재은이 묘사하는 젊은이들은 그들이 타는 인라인 스케이트처럼 공격적이고 역동적이지만 한편으론 설익은 존재들이다.

부나 명성, 개인의 영달 따위의 목표나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쳐버린 그들은 점점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는다. 프로 인라인 스케이터가 된 소요가 미국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들이 자신들 앞에 놓인 험준한 벽을 날렵한 인라인 동작처럼 무난하게 넘어갈 것임을 암시한다. '한 번 성공하기 위해 백 번 쓰러지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헌사로 끝나는 이 영화는 모두의 청춘 시절에 바치는 아름다운 송가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6-08 15:02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