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희망을 노래한 그녀불치병 환자가 죽음의 과정을 통해 깨닫는 삶의 가치
[문화가 산책] 윤석화의 <위트>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희망을 노래한 그녀 불치병 환자가 죽음의 과정을 통해 깨닫는 삶의 가치
무대위에 '작은 윤석화가 있다. 치열하게 투사로 걸어온 지 30년, 이제는 쉽고 편안한 길을 갈 수도 있을 텐데 또다시 도전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룬 국내 초연의 ‘위트’. 주인공 비비안 베어링(윤석화 역)은 17세기 영시(英詩), 특히 형이상학의 최고봉인 존 던의 시를 가르치는 명망 높은 그러나 인간미 하나 없는 대학교수다. 50세까지 결혼도 않고 친구도 없이 인간보다는 연구에만 매달려온 베어링은 난소암 말기 진단을 받고 그제서야 자신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살았던 지난 날을 돌이키며 죽음을 받아들인다. 암환자로 변신, 짧게 머리를 깎은 윤석화는 “잘려진 머리카락들과 함께 내 일상은 없어질 것”이라고 했는데 그 사라진 일상은 오롯이 무대에서 열정으로 피어난다. 창백한 얼굴, 작은 체구로 존 던의 시구가 가득한 무대에서 ‘홀리 소네트’를 강의하는 당찬 모습.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사위어가는 베어링의 역할에 군더더기가 없다. 고고하고 예민했던 베어링이 죽음 앞에서 점차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변화 과정은 지극히 섬세하다. 그래서 베어링이 허상이 아닌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며 사람과 사랑이 희망임을 배워가는 과정은 고스란히 감동으로 전달된다. 삶과 죽음의 간극을 이어가는, 때로는 삶과 죽음이 환치되는 순간들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공연이 끝날 때쯤에는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임이 인다. ‘위트’의 마지막, 링거 바늘을 빼고 육신을 떠난 베어링은 거대한 서고 속으로 사라지면서 “죽음도 나를 죽일 수는 없다”는 대사를 외친다. 서고는 베어링의 삶이 머물렀던 곳으로 인간미 없는 베어링이 암이라는 죽음의 과정을 통해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랑을 깨달으면서 새로운 삶으로 부활했음을 상징한다. ‘위트’는 불치병 환자의 치열한 삶, 죽음도 죽일 수 없는 아름다운 부활을 통해 삶의 진지성을 되새기게 한다. ‘위트’의 또 다른 소중한 미덕은 (윤석화의 표현대로) ‘관객과의 교감’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난해한 소재의 버거움이 있음에도 ‘교감’이라는 가치는 윤석화만의 독특한 힘, 치열하고 순결한 도전 정신이 전하는 선물이다.
1일 비바람이 부는데도 객석은 빈틈이 없었다. 암을 이긴 한 관객은 자신의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됐다며 감사해 했고, 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접하는 대학병원의 호스피스는 삶과 죽음이 가까이 동행한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전달했다고 평했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초대 손님으로 함께 한 정호승 시인은 스스로 느낀 ‘위트’의 메시지를 상세하게 설명, 공감을 이뤘다. 한 관객은 정 시인의 시 ‘산낙지를 위하여’중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는 구절을 인용, 삶의 가치를 해석하는 위트를 발휘해 훈훈한 분위기를 북돋웠다. 윤석화는 연극다운 연극이 점차 사라지고 화려한 몸짓과 소리, 시각이 각광 받는 현실에서 감성적인 쾌감 대신 지성적인 쾌감을 전달하고 싶다고 했다. 가볍고 즐거운 연극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에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위트’는 윤석화로 인해 더욱 돋보인다. 지천명(知天命)의 세월을 살아온 때문일까, 몸짓과 표정은 푸근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더 강해진 인상이다. 무대를 내려오는 모습에서 ‘큰’ 윤석화를 확인하게 된다. 마지막 앵콜무대 7월10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3672-3001).
입력시간 : 2005-06-0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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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