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그 가슴 절절한 사랑의 '길'

[문화가 산책] 연극 <눈먼아비에게 길을 묻다>
가족, 그 가슴 절절한 사랑의 '길'

마치 끊임없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정상까지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의 운명과 ‘슬픔도 힘이 된다’는 양귀자 소설의 메시지를 토속극으로 융합한 느낌이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눈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연출 손기호)는 극한의 비극적 상황에서 가족의 사랑이 어떻게 숙명 같은 슬픔을 넘어 삶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가를 감동적으로 전한다.

‘눈먼 아비…’는 경주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칠뜨기 아빠 이출식(김학선), 팔푼이 엄마 김붙들(염혜란), 소아암에 걸린 아들 선호(장정애) 등 한 가족이 겪는 고단한 삶이 기본 줄거리다.

극중 ‘이출식’은 말을 더듬는 정신장애인으로, 같은 마을에 사는 형이 주는 생활비로 가족을 부양하는 무능한 가장이다. ‘김붙들’역시 어릴 때 소에게 받혀 팔다리를 못 쓰는 신체장애인으로 걸진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며 마을 대소사에 안빠지는 억척스런 아낙네다. 열두살 선호는 항암치료로 늘 모자를 쓰고 있으며, 운동을 열심히 하면 큰 수술 받을 때 돈이 덜 들거라 여겨 열심히 공을 찬다. 선호의 누나(선향)는 자살했다.

잔인한 운명이지만 선호네는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며 절망하지 않는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처럼 여겨질 텐데도 이들은 현실에서 나름의 즐거움을 찾아내고, 실낱 같은 희망을 끄집어낸다

이출식은 대사가 거의 없는 대신 중간 중간 아들에게 '밥 묵자' '손톱 깎자' ‘업어줄까’ 라는 말을 던진다. 이는 자신이 어렸을 때 느꼈던 가장 좋았던 아버지의 모습(선호의 할아버지)을 자신의 아들에게 그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으로 이출식에게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다. 그래서 어눌하고 단순한 말이지만 핏줄이라는 인간 근원의 정서에 맞닿아 공감을 자아낸다.

김붙들은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며 폭소를 뿜어내 이출식의 무겁고 어두운 이미지와 대비를 이루며 웃음과 울음의 적절한 균형을 잡는다. 하지만 죽은 딸의 사진을 남 몰래 꺼내보며 눈물 짓고 암에 걸린 아들이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병구완에 모든 것을 바치는 모성(母性)에서 웃음 뒤의 더 큰 슬픔을 엿보게 한다.

죽어서도 가족 주위를 맴도는 선향 역을 맡은 국악인 정마리는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구슬프면서 따뜻한 민요를 풀어놓아 희ㆍ비극이 교차하면서 연결되는 감흥을 전한다.

선호의 병이 악화돼 치료를 받으러 떠난 뒤 출식은 선향이의 사진을 태우며 “향아, 이젠 가라. 좋은 곳으로 가라. 이젠 내가 할께”라는 마지막 대사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눈먼 아비에게 물었던 ‘길’에 대해 출식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답한다. 그것은 가족에 대한 지순한 사랑이다. 선호네 가족의 슬픔 삶을 지켜보면서 관객은 소박한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눈먼 아비…’가 보여준 희ㆍ비극, 긴장의 균형과 절제는 세 주역인 김학선, 염혜란, 장정애의 앙상블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들은 모두 ‘연우무대’ 출신으로 지금은 극단 ‘이루’에 적을 두고 있다. 2004년 문예진흥기금 연극부문 창작활성화 사후지원작에 선정된 바 있고, ‘제16회 거창국제연극제 희곡상’ 등을 수상했다. 7월 17일까지 평일 오후 7시 30분, 토요일 오후 4시와 7시 30분, 일요일 오후 4시 공연. (02)762-9190.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6-30 16:06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