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 자극, 음습한 뒷골목 잔혹사만화적 상상력과 천재적 영상감각으로 ?G어낸 쾌락의 극치

[시네마 타운]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 <씬 시티>
오감 자극, 음습한 뒷골목 잔혹사
만화적 상상력과 천재적 영상감각으로 빚어낸 쾌락의 극치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신물이 나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씬 시티>는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초절정 구경거리들의 잔치다.

스파이더 맨이나 배트맨 같은 슈퍼 히어로는 없지만 독창적인 세계관과 천재적인 영상 감각이 결합된 엔터테인먼트의 집결체다. 흠이 있다면 팝콘을 집어 먹으면서 보기에 어둡고 음습하다는 것. 고독한 남자와 더러운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범죄, 썩어 빠진 경찰, 섹시한 팜므 파탈, 순정적인 로맨스가 어우러진 이 영화는 오감을 자극하는 시청각 스타일의 향연이다.

질풍같은 속도로 돌진하는 자동차와 섹시한 가죽 옷을 입은 여자,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준 여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정적인 사내가 있다. <씬 시티>는 날카롭고 힘있는 선, 간결한 그림체, 대담한 색의 사용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소설을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겨낸다.

로버트 로드리게즈(<황혼에서 새벽까지> <데스페라도> <스파이 키드>) 감독은 선명한 흑백 대비, 시적인 로맨스, 유치한 쓰레기 감성을 무국적의 시공간 속에 완벽하게 녹여내고 있다.

스크린에 부활한 만화적 상상력
<씬 시티>의 이야기는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소설 10편 중 ‘The Hard Goodbye’ ‘That Yellow Bastard’ ‘The Big Fat Kill’ 등 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은퇴를 한 시간 앞둔 퇴물 형사 하티건(브루스 윌리스)과 그에게 생명을 빚진 소녀 낸시(제시카 알바), 거리의 파이터 마브(미키 루크)와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던 마브에게 하룻밤의 애정을 보여준 천사 골디(제이미 킹), 타락한 형사 재키 보이(베니치오 델 토로)와 그의 연인 셸리(브리트니 머피), 그리고 도시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전직 사진작가 드와이트(클라이브 오웬)가 주인공이다.

하티건, 마브, 드와이트의 내레이션에 따라 느슨하게 얽혀 있는 세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건전한 영웅들의 무용담이 아니라 실패자라 할 수 있는 고독한 영혼들의 활약을 보여준다. 범죄가 만연한 도시 ‘씬 시티’를 배회하는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로크 가문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공통점이 있다.

부패한 성직자 로크 신부(룻거 하우어)와 신부의 동생인 상원의원 로크, 그의 아들 로크 주니어(닉 스탈) 등은 신부에 의해 사육된 킬러 케빈(일라이저 우드)을 앞세워 씬 시티를 사악한 기운으로 지배하려 든다. <씬 시티>를 보면 첨단을 달리는 21세기에 대중 문화 장르 사이의 구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파이더 맨> <엑스맨> <헐크> 등 일찍이 수퍼 히어로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있었지만 <씬 시티>는 그들과 차원이 다르다. <엑스맨> 류의 영화들이 소재가 고갈된 할리우드에 새로운 아이템 창고 역할을 했다면 <씬 시티>는 프랭크 밀러의 전설적인 코믹스를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겨 오려 했기 때문이다.

<씬 시티>는 만화, 소설,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대중 문화 장르를 무작위로 섞은 극단적인 혼합물이다. 이야기와 대사, 캐릭터 등 프랭크 밀러의 원작을 충실히 옮겨 온 로드리게즈는 촬영, 음악, 편집 등 전 공정을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만화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시도한 특별한 제작과정도 성공적이다.

흑백으로 탈색한 그림 위에 부분적으로 빨강, 노랑, 초록 등의 원색을 입혀 원작 코믹스의 느낌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만화를 원작으로 했지만 <씬 시티>는 목불인견의 장면들이 즐비하게 펼쳐지는 잔혹 영상의 연속이다. 강간과 시체 훼손, 사지 절단, 전기 고문 등 공포영화를 繹爐?하지만 실사영화였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이런 장면들도 만화적인 화면 때문에 귀엽게만 보인다.

저예산으로 만들려면 이들처럼
<씬 시티>의 불가사의 중 하나는 할리우드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4,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손색없는 오락물을 만들어낸 노하우다. 더구나 브루스 윌리스, 클라이브 오웬, 제시카 알바, 베니치오 델 토로, 브리트니 머피, 조쉬 하트넷, 미키 루크, 일라이자 우드 등 동급 최강의 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웬만하면 함께 모이기 힘든 스타들이 패키지로 출연한 이유는 프랭크 밀러 원작의 인기와 감독 로드리게즈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고 한다. 촬영 전 로드리게즈가 만든 5분 길이의 데모 필름(영화 상에서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쓰였다)을 보고 출연을 결정한 배우가 태반일 정도로 로드리게즈의 아이디어는 강렬했다.

특수효과와 화면 합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탓에 허공에 대고 연기해야 하는 배우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결과는 썩 만족할만하다. 화려한 스타들의 놀랄만한 변신은 <씬 시티>의 가장 흥미로운 구경거리 중 하나다.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 일라이자 우드는 사지가 찢겨져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흘리는 잔혹한 싸이코 킬러로 180도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고, <나인 하프 위크>로 뭇 여성들의 오금을 저리게 만든 왕년의 섹시 스타 미키 루크는 인간 보다 괴물에 가까운 터프한 싸움꾼 마브 역을 완벽하게 연기한다.

그의 재기를 바랐던 올드 팬들이라면 인간 보다 괴물에 가까운 마브가 더 없이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인 하프 위크>의 달콤한 속삭임은 없지만 미키 루크는 여전히 ‘사랑의 화신’이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하트 모양 침대에서 보낸 골디와의 하룻밤을 추억하는 마브의 대책 없는 순정을 보노라면, 잘 나고 가진 것 많은 이들의 팬시한 사랑보다 뒷골목 하류 인생의 그것이 더 감동적인 주제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7-06 16:41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