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적 에로티시즘에 빠진 그들

[시네마타운] 루시아
탐욕적 에로티시즘에 빠진 그들

영화계에는 ‘한국식 제목'이라는 말이 있다. 외화가 국내에 수입될 때 한국 실정에 맞도록 제목을 바꾸는 경우를 두고 쓰는 용어다.

통상 알기 힘든 영문이나 밋밋한 제목을 선정적으로 개작해 원래의 뜻을 훼손하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되는데, <블로우 업>을 <욕망>으로, <브라질>을 <여인의 음모>로, 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등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이다.

<루시아>는 영화계의 제목 바꾸기 관행을 거꾸로 뒤집은 사례로 기억될만하다. <섹스 앤 루시아(Sex & Lucia)>라는 자극적인 원제가 관객의 호기심을 더 끌만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수입사는 <루시아>라는 밋밋한 제목을 내세웠다.

오금이 저리는 섹스 장면 하나 없어도 ‘섹스'라는 말을 제목에 버젓이 집어 넣는 세태를 떠올린다면, 실로 시류에 ‘역행’하는 모험적 시도라 할 수 있다.

수입사의 의도는 말초적인 쾌락에 호소하려는 싸구려 에로 영화가 아니라 품격 있는 예술 영화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제목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이 영화는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으로 파국에 이르는 인간을 보여주지만, 탐미적 에로티시즘 위에 가볍지 않은 인생에 대한 성찰을 덧씌운다.

내밀한 진실의 속살 들춰내기

죽음과 에로티시즘 프랑스 작가 조르쥬 바타이유는 저서 ‘에로티시즘'에서 죽음과 에로티시즘의 친족관계를 설파한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은 죽음과 연결되고

죽음의 순간 인간은 극한의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섹슈얼한 욕망은 죽음에의 동경에 다름 아니며, 성적 쾌락은 죽음의 경험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루시아>는 이 같은 생의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루시아(파즈 베가)는 6년 간 동거했던 소설가 로렌조(트리스탄 우요아)가 세상을 뜬 후 상실감에 시름시름 앓는다.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기 위해 지중해의 호젓한 섬으로 여행을 떠난 그는 천혜의 자연 환경과 그곳에서 만난 미스터리한 남자 카를로스, 민박집 주인 엘레나 등과 교류하며 평온을 찾는다.

하지만 로렌조를 축으로 맺어진 3사람의 과거 행적이 베일을 벗으면서 예상치 못한 비밀의 실체가 드러난다.

<루시아>는 한 인물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가지를 치면서 전체 등장 인물로 퍼져가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동상이몽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실체는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다르다. <루시아>는 양파 껍질 벗기듯 이들의 과거를 하나씩 풀어놓으며 내밀한 진실의 속살을 들춰낸다.

뒤엉킨 관계만큼이나 그걸 포장하는 재료들도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다. 소설가인 로렌조가 쓰는 소설과 그의 현실이 뒤섞이고, 실제와 꿈, 환상,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미궁 속을 헤매듯 이야기가 흘러간다.

관계가 하나 둘 씩 밝혀질 때마다 ‘그들 사이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된다. 이 난잡한 관계의 사슬을 맺어주는 끈이 있다면 섹슈얼한 욕망이다.

<루시아>의 성애 묘사 수준은 그간 한국의 영화 심의 기준을 뛰어넘을 만큼 파격적이다. 남녀 성기 노출은 예사요, 디테일한 성행위의 묘사도 수분간 이어진다.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자극한 이 강도 높은 에로티시즘 때문에 미국에서는 17세 미만 관객들은 영화를 볼 수 없는 'NC-17 등급'을 받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서슬 퍼런 심의의 가위질이 살아있는 한국에서 ‘무삭제'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영화 심의를 담당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까지 나서 “과거의 구태의연한 심의기준이 사라졌다는 결정적 증거"로 거론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섹스 장면은 표현의 강도가 세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파격의 영상미학

파격의 영상 미학 물론 파격의 섹스 묘사는 그저 말초적 쾌락을 위한 눈요기 용은 아니다. 대담한 섹스 장면은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장치로 동원되고,

다양한 성적 취향을 회피하지 않는 개방성도 욕망의 덧없음을 주장하는 결론을 위한 것이다.

모든 등장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밝혀지는 그들의 과거가 이 같은 점을 확인시켜준다.

<루시아>에서 강렬한 에로티시즘 만큼 뇌리에 남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의 아름다움이다.

보름달이 비치는 바닷가에서 펼쳐지는 도입부의 수중 정사, 파도?만들어낸 포말 위에 어리는 그림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코발트 빛 바다와 하늘 등 화려하고 추상적인 풍경의 이미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농담이 짙은 색감으로 덧칠된 유화나 총천연색 물감을 끼얹어 놓은 것 같은 영상은 잠시 동안 넋을 잃게 만든다.

잊을 수 없는 이미지들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는데 공헌한 것은 영화평론가 출신 감독 훌리오 메뎀의 연출력이다.

홀리오 메뎀은 페드로 알모도바르(<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오픈 유어 아이즈> <디 아더스>)의 뒤를 이을 스페인 영화의 기대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노보> 등에 출연했고 <스팽글리쉬>에서 억척스러운 스페인 이민자 여성을 연기한 매력적인 스페인 배우 파즈 베가의 농염한 관능미도 빛을 발한다. <루시아>는 아름다운 배우, 아름다운 로맨스,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관객의 눈을 현혹시킨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 감독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행위나 가치 뒤에는 추함도 함께 있다고 말한다. 선을 넘어버린 아름다움의 추구는 인간을 ‘도착'이나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하지만 유혹에 약한 인간이 그걸 깨닫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장병원(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09-07 11:40


장병원(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