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빛깔 사랑, 가을을 앓다

[시네마타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여섯 빛깔 사랑, 가을을 앓다

알 수 없는 우울과 감상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는 계절이 왔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스산한 고독의 계절 가을에는 역시 사랑영화가 제격이다.

지금 극장가에는 옆구리 허전한 싱글들의 가을나기를 도와 줄 멜로 영화가 한 보따리다. 각양각색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 재회의 사연을 담은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하 '내 생애')이 첫 손에 꼽힌다.

한 토막 사연으로만 성이 차지 않는지 떼거리 주인공이 등장하는 연애영화가 요즘 영화계의 추세다. 서너 커플이 각각의 로맨스를 펼치는 건 보통이고, ‘내 생애’ 역시 줄잡아 여섯 커플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 놓았다. 질 보다 양이냐고? 글쎄, 이 영화는 질에서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한국판 ‘러브 액츄얼리’

’내 생애’는 여섯 커플이 일주일간 펼치는 서로 다른 색깔의 사랑을 보여준다. 서른 살이 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나 형사(황정민)와 아이 달린 이혼녀 정신과 의사 유정(엄정화)은 TV 토론 패널로 티격태격하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변두리 극장의 수전노 곽 회장(주현)과 오드리 헵번 같은 은막의 스타를 꿈꾸는 오 여인(오미희), 카드 빚을 해결하기 위해 지하철 행상에 나선 새 신랑 창후(임창정)와 그의 부인(서영희), 아이돌 가수 정훈(정경호)과 그를 사모하는 수녀 수경(윤진서), 연예 기획사를 운영하는 냉혈한 조 사장(천호진)과 그의 집 남자 가정부 태현(김태현), 한 때 잘 나가는 농구 선수였으나 지금은 빚 독촉하는 카드사 직원이 된 성원(김수로)과 그의 병든 딸이 그 주인공들이다.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서로의 일상에 조금씩 발을 걸치고 있는 이들의 사연이 아름다운 일주일 간의 사랑 여행으로 안내한다.

‘내 생애’는 2년 전 크리스마스 시즌을 핑크 빛으로 물들였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후폭풍이 낳은 결과물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교차하면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였던 ‘러브 액츄얼리’의 신선한 재미에 고무된 한국 영화계에서는 집단 주인공의 에피소드식 이야기로 구성된 멜로영화가 대거 기획됐다. 곧 개봉할 ‘새드 무비’ 역시 같은 시기에 기획된 유사한 형식의 작품이다.

인물과 사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고민과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 같은 이야기 구조는 파편화된 현대 사회의 특성을 담아내는 적절한 이야기 방식이다. 사랑의 형태도 부부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뿐 아니라 부녀 간의 사랑, 통념상 금기시된 사랑까지 다양하게 그려진다.

영화 한 편을 통해 다채로운 이야기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으므로 관객으로서는 환영할만하다. 황정민, 엄정화, 김수로, 임창정, 윤진서, 주현, 오미희, 천호진 등 웬만하면 한 자리에 모이기 힘든 배우들을 함께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더기로 등장하는 배우들의 조화로운 연기 중에서도 발군은 나 형사 역의 황정민이다. <달콤한 인생> <천군> <너는 내 운명> <내 생애>까지 4편에 연이어 출연한 황정민은 4년 전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데뷔했을 때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무궁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나 형사와 유정이 영화 구경을 가 <달콤한 인생>을 보는 장면은 재치가 넘친다. 민규동 감독('여고괴담-두번째 이야기')은 “<달콤한 인생>에서 황정민의 연기에 대한 경외심을 담아 이 장면을 집어넣었다”고 고백했다.

조화와 균형의 미덕

다양한 에피소드가 엮어지는 영화의 관건은 여러 갈래로 펼쳐진 이야기 가지들이 일관성 있게 묶여지느냐에 달려 있다.

여러 인물들의 사연이 집약적인 주제로 모아지지 못할 경우 뒤죽박죽으로 보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내 생애’는 이 같은 위험성을 간단히 뛰어넘을만한 탄탄한 구조의 힘을 보여준다.

민규동 감독은 하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며내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는다. 팬시한 사연들로 이들의 사랑을 포장하려고만 했다면 이 같은 효과를 얻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내 생애’에서는 전형화한 연애 영화의 틀을 넘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인간에 대해 발언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엿보인다. ‘내 생애’는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채우는 사랑의 가치를 예찬하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양한 현실의 문제에 눈을 돌린다.

정색을 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영화는 관심과 인간애가 훼손돼가는 동정 없는 세상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응시한다.

카드 빚에 쫓겨 지하철 앵벌이에 나선 가장, 멀티플렉스의 위용에 밀려 퇴물이 돼 버린 재래식 극장, 자본주의 쇼 비즈니스 세계의 냉엄함, 그리고 두터운 편견의 벽이 가로막고 있는 성 정체성의 문제까지 이 영화가 걸치고 있는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직업과 세대의 측면에서 임의로 선택된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의 삶은 처음에는 산만해 보이지만 이야기에 살이 붙어갈수록 지금 한국 사회의 작은 초상화로 변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이처럼 강퍅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는 관심과 애정이라고 넌지시 말한다.

그 때가 되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영화의 광고 카피 같은 질문이 건네진다. '당신에게는 있었나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마지막에 떠오른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보게 되는 건 영화가 세상의 진실 중 한 자락을 살며시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5-10-17 17:08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