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하거든, 꾀병이라도 부려라

박봉에다가 연일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기 십상인 요즘 직장인들 중엔 ‘심신이 고단하고 피곤한 상태’ 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증상이라도 아마 십중팔구는 피로가 일시적으로 왔다 사라지는 단순피로이어서 하루나 이틀정도 푹 쉬고나면 몸과 마음이 다시 개운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데도 불구하고 피곤함이 가시지 않아 못 살겠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두 달 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김모(35ㆍ여)씨가 꼭 그런 경우다. 수 년전부터 만성적인 피로감으로 고생하던 김씨는 수 개월 전부턴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집중력이 떨어지고 급기야 탈진증상까지 나타나 직장생활을 더 계속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뚜렷한 발병 원인이 있었거나 특정 질병에 걸린 탓도 아니었다. “꾀병이 아니냐는 주변의 눈총을 받은 적도 있다”는 김씨는 “그 고통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를 것”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일중한의원(www.iljung.co.kr) 만성피로클리닉의 김준명(35) 원장에 따르면, 간염 결핵 전립선염 등 특정 질병에 대한 검사 결과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피로가 6개월 이상 지속되거나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만성피로증후군을 의심해 볼 만하다.

환자들이 주로 호소하는 증상들은 ‘아무리 충분한 휴식을 취해도 피로감이 가시질 않는다’ ‘기억력과 집중력이 뚝 떨어졌다’ 등이며 심한 경우 ‘일상적인 업무를 본 것 뿐인데도 탈진 상태에 빠졌다’는 사람도 있다.

불행하게도 만성피로증후군을 깨끗이 씻어 주는 치료법은 아직까지 없다. 발병 원인과 증상이 아주 복잡한 탓이 크다. 만성피로증후군을 다스리는 방법은 양ㆍ한방이 사뭇 다르다. 치료의 개념부터가 판이한 까닭이다.

몸에 침입한 ‘병(病)’에 치료의 초점을 맞추는 양방에서는 각종 검사를 하면서 질환의 발생 가능성을 하나둘 씩 배제해 나가는 한편 증상에 맞춘 약을 쓰는 대증요법에 치중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몸에 동통(疼痛, 신경의 자극으로 몸이 쑤시고 아픈 증상)질환이 심하다면 항생제나 소염진통제를 쓰고, 스트레스 탓이라는 의심이 들면 정신과적 상담을 하는 식이다.

반면 치료의 초점을 ‘건강과 사람’에 맞추는 한방에서는 한약 처방과 침 시술로 잘못된 장기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한다.

탕약침술 병행하면 치료효과 배가

한방에서는 만성피로증후군을 오장육부 중 간과 비위의 기능이 나빠진 노권상(勞倦傷)과 허로(虛勞), 두 가지 개념으로 본다.

노권상이란 ‘노즉기모(勞則氣耗)’라 하여 과도한 업무나 노동, 스트레스로 기(氣)가 부족해진 상태이고, 허로는 이것이 더 심해진 경우라고 설명하는 김 원장은 “이런 경우 간을 풀어주고 소화기를 잡아주는 일중보간탕을 한두 달 정도 복용토록 한다”고 치료법을 소개한다.

“노권상이나 허로로 기가 떨어진 경우 간장의 기운이 울체돼 있고 비장, 즉 소화기의 기능이 원활치 못한 탓으로 인체 면역력이 떨어져 피로가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간장을 풀어주고 소화기 기능을 회복시키는 효능을 가진 인지, 객사, 시호, 물금 등의 약재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서 피를 저장하고 물질의 합성과 해독에 관여하면서 희로애락 등 칠정(七情)의 감정을 조절하는 역할까지 하는 간은 동방목(東方木) 기운으로 쭉쭉 뻗는 성질을 가졌는데, 울체가 생겨나면 인체 면역력이 떨어지고 피로가 오게 된다.

간장의 기능이 떨어지면 목극토(木剋土, 나무가 흙의 자양분을 빼앗음)의 이치에 따라 토(土)의 기운을 갖고 있는 비장의 기능이 함께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떨어진 비장의 기능이 원활하도록 하는 백출, 산사 등의 약재를 쓴다는 것이 김 원장의 설명이다.

대전대 한의대 교수이기도 한 김준명 원장. 그는 독자 제조한 일중보건탕 처방으로 만성피로증후군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있다.

한약처방은 일중보간탕이 기본이지만 환자 상태에 따라 특정 약재를 가감해야 한다. 과도한 업무나 접대, 흡연 등으로 피로가 온 것이라면 외부로부터 들어온 탁한 기운을 빼주는 금전초를 함께 쓰고, 몸이 비쩍 마른 체형에다가 열이 있고 기가 부족한 음허(陰虛) 환자라면 육미지자를 추가함으로써 신장의 기능을 보(補)한다는 것이다.

김 원장의 말에 따르면, 탕약을 복용하면서 침을 함께 맞으면 치료 효과가 더욱 좋다. “간과 비장의 기능이 크게 떨어진 경우 간정격과 비정격에 사암침을 1주일에 2번 정도 맞으면 되고, 심리적 불안감과 스트레스가 원인인 경우 백회, 신정, 사관 등 담정격에 침을 놓기도 한다”고 말한다.

‘몸이 허하다거나 기가 부족하다’고 자가 진단을 내리고 무턱대고 녹용 등 보약을 찾는 것은 자칫 해가 될 수도 있다고 김 원장은 경고한다.

“몸의 에너지 수준을 끌어올리는 보약은 기가 떨어진 사람에게는 효험이 있지만 만약 기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에너지는 차 있는데 에너지 균형이 흐트러진 경우라면 기가 더욱 엉켜 피로 증상이 되레 악화할 수 있습니다.”

집중력 저하로 만사가 힘겨워

“원장님, 지금 이메일을 쓰는 중입니다. 그런데 요즘 집중력이 하도 떨어져서 이메일을 끝마칠 수 있을 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중한의원 김준명 원장이 들려준 만성피로증후군 상담 내용 중 하나다.

그는 “그것도 병이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환자들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는 정상인들은 잘 모른다고 잘라 말했다.

어떤 환자는 차를 몰던 중 급작스런 피로감으로 운전대를 잡을 수 없었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전립선염으로 내원한 환자 10명 중 8명은 피로 증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 30~40%는 전립선염을 완치한 이후에도 증상이 가시질 않아 의아하단 생각을 했지요.” 만성피로증후군에 맨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하던 김 원장은 환자 수는 30~40대 여성이 가장 많지만 치료가 정작 절박한 사람들은 매일 격무에 시달리는 중년 직장인들이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플 때면 의사가 아니라 건강식품부터 찾는데 시간에 쫓기다 보니 그런 것같다면서 안타까워한다.

김 원장은 이어 기의 흐름은 남녀가 각기 다르다고도 말했다.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남성의 경우 신체적 장애가 생겨나는 경우가 드물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면서 그 이유가 신체의 생김새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몸의 생김새가 각(角)이 진 남성들은 기가 잘 빠져나가는 구조이지만 동글동글한 모양의 여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성들 중에는 관절통, 요통 환자가 많은 것입니다.”




송강섭 의학전문기자 special@hk.co.kr